원문 : http://www.ingopress.com/ArticleRead.aspx?idx=1208
‘투명한 공론화=국민 참여·신뢰’ 원칙 | |||||
유럽의 핵폐기장을 가다 | |||||
이헌석 | |||||
핵폐기물 논쟁은 이제부터 시작 우리만의 공론화 방식 창출 과제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분한 논의와 관련 연구라는 것이다. 특히 고준위핵폐기물에 있어 사회적 합의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과학기술적 연구 성과는 ‘시간’으로 판가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러한 방향으로 논의가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영국의 경우 1990년대 초 중저준위 핵폐기장 건설을 위해 500여곳의 지역조사 등을 진행하였으나 애초 후보부지에 없던 셀라필드 지역이 선정되면서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셀라필드 지역은 핵재처리 시설을 비롯한 핵연구단지가 있는 곳으로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의 교훈 그러나 주 의회의 건설허가 신청 반려, 정부자문기구인 방사성폐기물관리자문위원회(RWMAC)의 부지안전성 추가조사 권고, 지역주민단체와 환경단체의 반발 등의 사회적 논란과 공청회를 거치면서 1997년 핵폐기장 준비 단계에서 건설 예정이었던 암반연구시설(RCF) 계획이 취소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영국 상원은 ‘의사결정과정에서의 공개성, 투명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국민들의 신뢰’의 중요성과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구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는 등 실패의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영국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고 권한을 갖는’ 공론화 기구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CoRWM(the Committee o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이다. 관련 전문가 및 학계, 환경단체 구성원 등으로 이루어진 CoRWM은 핵폐기물 문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사항을 정리하고, 선택가능하고 환경적 문제가 없는 장기적 해결책을 권고’하는 역할을 갖는다. 이전에 무차별적으로 부지를 선정하는 방식에서 현재 가능한 모든 선택사항을 정리함으로써 ‘일반 국민의 신뢰’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학생, 전문가, 지역주민, 관련 전문가를 망라하는 다양한 논의구조와 수백차례의 크고 작은 토론모임을 통해 논의를 진행, 지층처분과 추후 논의구조를 위한 기본 방식 등 15개항의 권고사항을 도출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CoRWM의 보고서를 영국정부는 수용했고, 현재 추후 논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진행 중에 있다. 1997년 핵폐기장 선정 실패로부터 출발하여 2006년 7월 CoRWM 보고서를 통해 사회적 합의의 첫 걸음으로 나아가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이러한 과정은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미 1995년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과 활성단층 발견, 전면 백지화의 과정을 겪었던 우리나라였지만 이후 달라진 것이라곤 주무부서가 과학기술부에서 산업자원부로 바뀐 것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 할 때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30년째 연구 진행 벨기에 한편 우리의 원자력연구원에 해당하는 벨기에의 ‘SCK-CEN’에선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을 위한 연구가 30년째 이어지고 있다. 유럽 공동연구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벨기에의 고준위폐기물 관련 연구는 1974년 심층처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실증연구시설을 건설하여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벨기에의 다양한 지층구조와 핵폐기물의 특성을 고려할 때 ‘Boom Clay(진흙)’층이 처분에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PRACLAY’ 프로젝트는 1997년부터 시작되어 2015년 완료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로 진흙층에 핵폐기물을 처분할 수 있는 실증자료를 얻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러한 실증 프로젝트를 통해 관련 지층의 특성연구, 굴착방법 및 보관용기, 열 변화에 따른 연구 등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30년을 진행해 왔으나 아직도 계속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준위핵폐기물 처분 문제는 아직도 풀어야할 과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핵발전 밀어붙이는 프랑스 유럽의 또 다른 한편에선 사용후 핵연료를 가지고 핵재처리를 하고 있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는 대규모 핵 재처리 시설을 갖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자국의 사용후 핵연료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과 일본의 사용후 핵연료를 상업적 목적으로 재처리하고 있다.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란 핵발전소에서 사용하고 남은 사용후 핵연료를 화학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여 우라늄과 플로토늄을 분리해내는 과정을 말한다. 타고 남은 핵연료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핵산업계에선 에너지원의 ‘재활용’이라고 극찬하는 반면, 환경단체와 시민사회에선 핵발전을 계속 유지시키고 플루토늄 같은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강력히 반대하는 사안이다. 우리나라 역시 고준위핵폐기물은 대부분 사용후 핵연료이기 때문에 고준위핵폐기물문제를 다룰 때마다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문제는 항상 함께 언급되는 사안이다. 특히 현재 우라늄의 자연채광연한이 80년 정도 남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핵연료의 재처리 문제는 핵발전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과 핵무기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로카쇼무라 재처리 시설이다. 상업적 핵발전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처리를 하고 선전하는 일본이지만, 상업용 목적의 ‘MOX연료’(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섞은 핵연료)의 안전성 논란과 사용을 희망하는 발전소가 없음에도 플루토늄을 계속 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핵발전 강국 프랑스의 핵재처리 시설은 그 규모와 기술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이미 일본의 사용후 핵연료를 유럽까지 운송-재처리-다시 운송한 경험을 갖고 있는 프랑스의 핵발전-재처리 그룹 아레바(AREVA)사는 핵재처리의 안전성과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했다. 핵연료의 채굴, 정련, 농축, 발전, 핵재처리, 송전, 배전 등 핵발전의 모든 기술을 갖고 있는 거대 핵산업계의 대표주자 아레바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겠지만, 핵발전 중심의 정책 일변도를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모습은 앞서 본 영국과 핵발전소 폐쇄 법안을 통과시킨 벨기에와는 상반된 느낌이었다.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럼 우리는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안면도와 굴업도 그리고 부안의 사례처럼 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와 백지화를 반복할 것인가. 경주 주민투표처럼 지역감정과 금권·관권 시비 속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자족하고 말 것인가? 안타깝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과거의 악습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우리가 과거의 교훈으로부터 얻은 것은 ‘방폐장=돈(3천억원+알파)’라는 세속적 관심사 밖에 없었고, 핵폐기장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은 ‘당사자들(지역주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사회의 냉대 뿐이었다. 외국의 사례를 국내에 그대로 들여오는데는 많은 문제가 있다. 각자의 경험과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결정의 공개성, 투명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국민들의 신뢰와 참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 당연하고 교과서 같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인 핵폐기장 문제를 중저준위와 고준위로 나눠 그 중 하나를 해치웠다고 자신하는 중앙정부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까지 썼던 편법이 아니라 정도를 통해 해결하고자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모든 것이 정권의 ‘정책적 의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논의를 위한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고 그 합의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가 잘못된 결정을 할 때 ‘문제제기’와 ‘감시’할 수 있는 국민들의 여유와 합리적 판단이 요구된다. 우리나라에서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 시작이다. 이 논쟁은 외국의 사례나 지금까지 진행된 내용을 볼 때 최소 10년 이상 진행될 것이다. 이 짧지 않은 시간을 또 다시 강행과 백지화, 그리고 사회적 비용 증가의 혼란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만의 새로운 공론화 방식을 만들어 낼 지는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유럽의 사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예시에 불과할 뿐 우리의 선택은 다를 것이다. 새로운 선택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발자국, 그것은 작지만 소중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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