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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반핵운동의 역사와 전망

한국 반핵운동의 역사와 전망


반핵운동의 역사 한국 반핵운동은 1987년 전남 영광주민들의 어업피해 보상투쟁에서 그 시초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원자력발전소는 민족중흥의 불로 일컬어지며 지역경제의 발전은 물론 산업화, 문명화의 첨병으로 인식되어질 때였으므로 비록 어업피해 보상운동 차원이었지만, 이 일은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집단적으로 대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원자력 발전소 가동 및 건설에 따른 피해보상운동에 이어진 것은 방사능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다. 88년 10월 발생한 박신우씨(당시 48세, 고리 원자력발전소 10년 근무, 한국전력 기술안전 총괄부장)의 임파선암 사망사건은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된다. 연이어 알려진 월성 원자력발전소의 중수누출사건, 고리 핵폐기물 불법매립 사건 등은 방치된 원자력발전소 안전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하겠다. 특히 양산에서 드럼통, 장갑 등 핵폐기물이 마을 한복판에 불법매립되어 주민에 의해 발각된 사건은 원자력발전소 가동으로 경제적 피해를 보고 있던 지역주민들의 분노에 불을 당겼다. 분노한 주민들은 한국전력 본사를 점거농성하고 양산, 영광 등 원자력발전소 지역에서 동시다발 시위를 벌였다. 또한 박신우씨 사망, 핵폐기물 불법매립 사건 등에 적극적 활동을 벌여온 공해추방 운동연합을 비롯한 환경, 보건의료 단체는 88년 12월 지역주민과 연대하여 서울에서 "반핵평화 시민대회"를 개최하므로써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소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화되고 지역주민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는 시기는 89년으로, 경북 영덕지역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한국 반핵운동의 제 1호 승리를 가져온 곳이다. 89년 3월, 정부가 전국의 핵폐기장 후보지 조사를 통해 동해안의 3개 지역을 핵폐기장 후보지(1순위 경북 영덕군 남정면, 2순위 영일군 송나면, 3순위 울진군 기성면)로 내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1순위로 지정된 영덕군에서는 대대적 저항운동을 벌였다. 면단위 집회에만도 어린이에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3천여명의 주민들이 참여했고 국도점거 투쟁 등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당시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조직적이고 강력한 반대투쟁에 부딪힌 정부는 결국 3개의 동해안 핵폐기장 후보지를 백지화했다. 이로서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효시가 된 영덕주민의 승리는 추후 전개될 안면도를 비롯한 핵폐기장, 원자력발전소 반대운동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환경, 보건의료, 사회단체, 학생조직과 지역민대책위가 연대하여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전핵추본)"를 결성했다. 전핵추본은 원자력발전소 핵폐기장의 위험성을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한 선전홍보활동과 한전기술노조와의 찬반토론회 개최 등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사회문제화시키는데 주력했다. 뒤이어서 9월엔 원자력발전소 11, 12호기 건설저지운동과 핵폐기장 건설백지화 부분을 핵심사업으로 하는 "핵발전소 11, 12호기 건설반대 100만인 서명운동본부(위원장 한승헌변호사, 서명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두 조직은 사회각계각층이 참여한 "핵발전소 11, 12호기 건설을 반대하는 100인 선언"을 이끌어내고 서명자만도 12만명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원자력발전소를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은 지역단위에서도 전개되었다. 89년 2월 "영광핵발전소 추방운동연합(의장 서 단)" 창립과 더불어 11월엔 "전남지역 핵발전소 30기 건설계획철폐 공동투쟁위원회(30기 후보지역: 전남 보성, 해남, 신안, 여천, 고흥, 장흥지역)"가 결성되었다. 30기 예정지역 주민들은 공동전선을 형성, 강력한 반대입장 천명 및 환경단체와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영광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의 경우에도 주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미진했지만, 영광지역은 이미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곳으로, 지역주민들은 추가 건설될 원자력발전소로 인한 피해보다는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로 인한 피해가 더욱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역조직으로선 처음으로 피해보상운동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는 반핵운동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①고리 원자력발전소 노동자 방윤동씨(당시 29세, 한전보수주식회사 기능보조원 근무중 피폭) 위암사망(89. 6. 10) ②영광 원자력발전소 일용노동자 김익성씨 무뇌아 사산(89. 7. 28) ③영광 원자력발전소 일용노동자 김동필씨 기형아 출산(89. 8. 4) ④고리 원자력발전소 인근에서 잠수부 일을 하던 김방규(당시 41세)씨의 부인이 2명의 기형아를 낳은지 1년안에 모두 사망한 사건, ⑤고리 핵발전소 지역인 효암리에서 1년동안 사망한 주민 8명의 사인이 모두 암으로 밝혀진 건(89. 8. 10 부산일보 보도) 등 이외에도 원자력발전소 인근에서 기형어가 잡히는 것은 다반사가 되었고 기형가축 발생 횟수도 잦아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핵발전소 지역주민들이 겪는 일상적 피해에다 정신적 불안감마져 가중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방사능피해에 관한 사회적 논란이나 진상규명 운동은 그 피해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규명되거나 운동적 차원으로 승화되지도 못해 89년 이후엔 방사능 피폭과 관련한 논란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방사능 피폭으로 기형아를 출산하거나 사망할 경우 진상규명이 핵심이었으나 반핵운동 진영이 과학적인 입증을 하기도 어려웠고 한전은 당연히 부인을 했으므로 공전을 거듭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이문제가 알려지면서 진상이 밝혀지거나 보상을 받기는 커녕 언론사의 일회적인 취재거리로 취급되거나 오히려 기형아를 낳은 집이라는 소문때문에 구경거리나 집안의 수치로 알려져 정신적 피해가 더욱 가중된 점이다.

89년의 조직화된 운동은 90년 안면도 핵폐기장 반핵투쟁을 맞아 절정을 이룬다. 90년 11월 3일 한 조간 신문을 통해 보도된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소식은 말 그대로 편안히 쉬고 있던 안면도 주민들을 반핵의 열풍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장단 사퇴, 초중고등학생 등교거부, 중·고등학생 자체집회, 경찰서 방화, 2만여 주민 동시 집회 등 전국을 뒤흔들만큼 격렬했던 안면도 반핵투쟁은 우리나라 반핵운동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안면도 주민들의 투쟁은 밀실행정의 상징, 과기처 장관을 몰아냈고 정부의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원칙도 민주적, 공개적으로 지역주민과 협의하여 하겠다는 입장을 끌어냈다. 안면도의 승리는 지금도 반핵운동의 교과서가 되고있다. 물론 안면도뿐만 아니라 한 지역의 반핵운동 투쟁사례는 거의 비슷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어져 계승 발전되고있다.

안면도 반핵투쟁 이후 정부(과기처)는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이 단순히 자연과학적인 조건만을 고려해서 선정하거나 주민의 동의없이(또는 주민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보지 선정작업을 위해 대학의 연구소에 용역을 발주했다. 전국의 임해지역(당시 동력자원부가 임해지역 47곳을 후보지로 선정했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활동을 벌여 후보지 지역의 인문사회적 조건을 파악, 효과적인 주민 설득방안을 연구케 한 것이다. 또한 과기처는 국민의견을 수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은 직접 나서지 않고 대학의 연구소(서울대 인구 및 발전문제연구소 등 )를 내세워 주민의견을 수렴하는(사실상 설명회) 토론회를 개최했다. 소위 '핵폐기물 처분에 관한 공개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토론회는 출발부터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서울을 비롯해서 소도시를 순회하는 동안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2번(강릉, 서울)이나 토론회 자체가 무산되었다. 정부는 설명회 뿐만 아니라 핵폐기장을 유치하는 공모를 하기도 했으며, 금품살포를 통한 지역주민 회유 와 해외시찰 등 갖은 방법을 동원, 후보지 선정을 위해 사력을 기울였다. 92년에 있을 총선과 대통령 선거전에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해서 였다.

정부의 "연내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방침에 대응하기 위해 환경단체 및 지역주민대책위는 원자력발전소 핵폐기장 건설을 막기위한 23개 환경단체 및 지역주민대책위가 참여하는 "전국 핵발전소 핵폐기장 반대대책위원회"(91. 11. 5 공동위원장 최열, 임원식, 서한태)를 결성했다. 대책위는 "전국 어디에도 핵폐기장은 안된다"는 목표를 내걸고 "핵발전소 핵폐기장건설저지결의대회"(91.12 서울 탑골공원)를 개최하며 전국적 활동으로 대응했다. 이때에는 핵폐기장 6개 후보지가 선정되기전이었지만 토론회를 포함한 집회에 지역주민들이 조직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91년 7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가 핵발전소로 내정되어 고성주민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는 중이었고 또 6월엔 동력자원부가 장기전원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9개 지역(전남 6개지역과 강원 삼척, 경북 울진,충남 서산 등)의 신규 원자력발전소 후보지를 발표한 이후였기 때문에 각지역에서 반대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기존에 핵폐기장 후보지로 내정되었던 경험(89년)이 있고, 가동되는 2기뿐만 아니라 추가로 15기를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울진군 핵단지화" 발표를 접한 주민들은 전군민적인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전남 지역 및 강원 고성에서도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등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 발표는 오히려 전국 각지의 반핵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동시다발적 반대운동은 정부의 신규 지역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을 무산시켜 버렸다. 당분간 정부와 한전은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을 반핵운동의 취약지역인 기존부지에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핵폐기장 분야에서 정부는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1년 12월 25일 핵폐기장 후보지 6곳(강원도 고성과 양양, 경북 울진과 영일, 충남 안면도, 전남 장흥)을 발표했다. 국민적 여론을 잠재우고 주민들의 투쟁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연말의 어수선한 틈을 타 후보지 발표를 했으나 6개지역 주민들은 연말연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발적이고도 강력하게 정부발표에 저항하는 투쟁을 벌였다. 울진에선 발표일부터 약 한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군민궐기대회를 열어 전군민이 반대했으며 양양, 영일 등의 동해안 주민들도 궐기대회는 물론 국도점거투쟁 등 강력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안면도 이후 다시 전국을 반핵의 열풍으로 몰아넣은 6개 지역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결국 정부의 "핵폐기장 최종후보지 연내 확정" 목표를 저지해내고야 말았다.

이듬해 3월에 있은 13대 총선에서 정부의 핵정책은 주민들로 부터 냉혹한 심판을 받았다.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된 지역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핵폐기장 반대를 주요공약으로 내걸었다. 울진에서는 여당의 현역 중진의원이 지역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에 의해 낙선이 되는 이변이 일어났으며, 안면도에서도 후보지 선정 당시 임기중에 있었던 민자당 의원이 낙선되었고 그외 지역에서도 반핵을 주요공약으로 내건 후보만이 당선될 수 있었다. 핵폐기장 후보지 주민들의 이러한 심판은 정부에게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어 후보지 선정을 대통령 선거이후(92.12)로 미룰 수밖에 없도록 했다.

핵폐기장 지역주민들의 반대운동은 돈과 공권력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통해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안면도이후 밝힌 공개적, 민주적으로 핵폐기장 후보지를 선정하겠다는 방침을 철회하고 강제적인 법집행을 통해 후보지 선정이 가능한 "방사성 폐기물 관리사업 촉진 및 지역지원에 관한 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93년 12월) 이 법안의 핵심적 내용은 '지역주민과 협의 없이도 과기처 장관이 지정고시만 하면 후보지를 선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법적 강제력을 동원, 반핵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으로 핵폐기장 정책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특별악법 제정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환경단체 및 주민조직은 연대투쟁을 벌였으나 사회전반적인 여론 조성이나 의회차원의 교섭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한계를 노정했다.

이 법안을 근거로 물밑에서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작업을 준비해오던 정부는 94년들어 TV 방송과 신문을 통해 대대적인 선전공세 (환경운동연합은 94년 11월 정부를 상대로 핵폐기장 허위광고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은 현재 소송 계류중에 있다)를 벌이면서 이번에도 연말인 12월 22일 후보지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 발표했다. 정부는 굴업도 선정이전에도 경남 고성과 양산, 울진, 영일, 안면도 등에서 금품이나 공권력을 이용하여 끊임없는 설득작업과 회유작업을 벌였으나 주민들의 단결된 힘에 번번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므로 굴업도 핵폐기장 선정은 곧 6개 핵폐기장 후보지 주민들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정부가 핵폐기장 후보지로서의 가장 기본적 원칙인 자연과학적인 조건조차도 확보하지 못한 채 지역주민이 가장 적다(굴업도 인구 9명)는 이유만으로 후보지로 선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판단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덕적면 주민들의(굴업도는 덕적면의 한 행정단위) 지칠줄 모르는 반대투쟁에 직면해있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학생운동의 조직적 참여와 인천시민 및 시의회차원으로까지 확대되어 간단없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6.27 지자제 선거에서 굴업도 핵폐기장반대투쟁위 사무국장이 군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앞에선 주로 지역주민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의 반핵운동을 설명했다. 그러나 지역주민 운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한 반핵환경단체의 역할이다. 지역주민들은 핵문제를 지역적 차원을 넘어 본래적 의미의 '반핵'(내 지역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도 핵은 안된다)으로 나아가기까지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환경단체들은 주민들이 지역적 문제에 머물러있을 때 사회단체 및 전문가들을 조직해 핵문제를 공론화, 전국화시켜 왔다. 또한 핵폐기장 문제만 아니라 일본의 고속증식로 건설과 플루토늄 수송문제, 러시아와 일본의 동해 핵투기 문제, 핵강대국의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핵문제를 다루면서 반핵운동을 이끌고 있다. 국제연대영역도 날로 확대되어 94년 4월 핵발전소, 핵폐기장 후보지역 등 전국을 순회하며 벌인 반핵캠페인(그린피스, 환경운동연합 공동주최)을 시작으로 반핵아시아포럼, 반핵운동가 해외연수 등 반핵운동의 질적 강화를 위해 지역주민들과 더불어 국제연대활동도 점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출처-http://antinuke.kfem.or.kr/history.htm/환경운동연합 조사국장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