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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환경/생태

영흥도, 8박9일간의 '투재앵' - 간호대 환경현장활동을 다녀와서

인터넷 상에 이런 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97년 환활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이글은 환활과 영흥도에 대한 기억 중 하나일 것이다.

http://medicine.snu.ac.kr/aorta/sub1/10/10yk-3.html




영흥도, 8박9일간의 '투재앵'

- 간호대 환경현장활동을 다녀와서

서영진(간호2)

제6대 간호대는 7월 2일부터 7월 10일까지 8박 9일 동안 영흥도로 '자본의 반민중적 반생태적 환경파괴에 맞선 97여름 환경 현장 활동'을 다녀왔다. 15명이 조금 못 되는 단촐한 환활대였지만 한솥밥을 먹으며 살을 부비며 1주일간을 재밌게 지내다 왔다. 이제 그 얘길 좀 해볼까?

1학기 내내 영흥도 지지방문, 답동 지지 방문을 했었기 때문에 별로 특별하다는 생각도 않고 환활(환경현장활동)을 시작했다. 인천 답동성당에 가서 주민분들과 만나고 선전전을 하는 걸로 환활 일정은 시작되었다. 사복경찰이 우리를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지만 선전물을 뿌리며 동인천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이동했고 가는 길목 길목마다 검문을 당한 후에야 부두까지 갈 수 있었다. 전경이 화물칸을 수색하고 플랭카드를 압수하자 우린 너무 화가나서 유리창을 마구 두드리며 항의를 하기도 했고 배를 타기 전에는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리워가며 확인하는 끝에 겨우 영흥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흥도에 도착해서도 검문을 하겠다는 경찰에 맞서 전원이 '배도 떠났다. 바다에 떠 밀어 넣든 가스를 먹이든 맘대로 해라. 우린 절대로 검문에 응할 수 없다'고 연좌농성을 해서 무사히 들어갔다.

영흥도에 도착해서는 큰 일이 없었다. 그저 일하고 밥먹고 간활 수행하고 분반활동하고...

주로 구속자 집의 일을 했었다. 포도밭 일과 논일. 포도밭일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는데 허리가 무지 아팠지만(신체 길이에 따라 아프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 '포도가 나를 보고 웃고 있어.' 라는 유행?諍? 생겼났다.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 논일은 정말 끔찍했다. 물컹물컹한 진흙의 느낌. 발가락 사이로 진흙이 지나갈 때는 뱀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하지만 논이 너무 좋아 주저 앉아 버린 사람도 있었으니... 그녀는 다름아닌 우리의 공주님이었다.

갯벌에서 일하는 날도 있었다. '투재앵'을 분노에 차서 외치시며 우리에게 결의대회를 하는 것같은 분위기를 조성해 주시던 할아버지. 그분을 따라서 갯벌에 들어갔는데, 겉에서 보기엔 시커멓게 죽은 땅 같았지만 갯벌에 직접 다리를 걷고 들어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갯벌 표면을 가득 덮은채 거미처럼 기어 다니는 작은 꽃게들, 군데 군데 숨구멍을 내고 숨어 있는 낙지... 그냥 쓸어 담기만 하면 될 정도로 가득한 바지락. 이 곳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겠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얼마만큼의 보상이라도 이것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업벌 공사 현장 견학 투쟁도 했었다. 공사현장에서 주인이 건설을 반대하며 팔지 않은 논 주위로 물길도 내 놓지 않고 흙을 마구 쌓아버린 모습, 역시 땅을 팔지 않아 무덤 주위만 동그랗게 남겨 놓고 마구 깎아버린 산. 나무가 빽빽히 들어 서 있는데 산을 깎아내야 한다고 주위에 설치해놓은 폭약들. 또 바다를 메우느라 분주히 흙을 실어 와서 바다에 퍼붓는 트럭을 직접 보기도 했다. 정말 부르르... 도대체 그 사람들의 눈에는 여기 이 산에서, 바다에서, 갯벌에서 숨쉬는 생명들이 보이지 않는것일까?

숙소는 처음 겉에서 봤을 때는 호텔같다며 좋아했었는데 수시로 물이 끊기는 곳일 줄이야... 그리고 화장실에서도 할 수 있는 일과 하면 안되는 일이 정해져 있는 황당함. 특히 매끼 식사는 정말 기적적으로 챙겨먹을 수 있었다. 화장실 물을 퍼서 밥을 하기도 하고, 카레에 녹색 건더기와 수세미 국물을 우려내기도 하고. 벌레가 들어가는 정도는 일상생활로 그 누구도 놀라지도 않았다. 알뜰살뜰한 총무님 덕분에 감자국, 채썬 감자 볶음, 납작하게 썬 감자 볶음, 감자 조림, 감자 참치 볶음, 감자 햄 볶음. 새참까지 찐 감자. 환활이 끝날 때쯤엔 모두들 감자를 보기만 하면 구역질을... 삼킬때의 그 뻑뻑함이 너무나 친숙해졌었다. 먹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그래도 카레도 먹고 짜장도 먹었으니 양반이었다. 같은 마을에 전주대와 같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주대는 요리기구와 식기는 정말 빠방하게 준비했었는데 식료품은 정말 빈곤했었다. 감자국을 중심으로 콩나물국, 김치국을 계속 번갈아 먹었다나? 가끔 바지락이 들어간 콩나물국에 감격하고. 반찬 또한 김치를 중심으로 감자 볶음, 단무지를 계속 번갈아 먹었다더군. 그렇게 부실하게 먹고도 아침 체조는 유격훈련. 뻗어버리는 여학생도 있더군... 멋있는 사람들이었다. 몸짓패도 있었는데 깃발춤을 정말 멋지게 추던 96들. 서툴지만 그 신명하는 한 판을 너무 사랑하던 풍물패. 그리고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학번 선배님들... 그리고 이장님까지.

집과 집 사이가 너무 멀어서 이동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간활을 수행하는데 정말 애를 먹었다. 집 찾아가는데 시간을 거의 다 소비하고... 그런데 처음 해본 간활은 정말 감동 그자체였다. 분반활동도 주민들을 만나는 것이긴 하지만 직접 집에 찾아가 간호활동을 핑계로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그래 바로 이렇게 다가가야 한다. 확신이 섰다.

마을 주민분들도 섬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언니, 엄마 같은 아주머니들. 밤늦게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하시는 할머니 폭주족, 밤이면 직접 잡은 생선을 숯불에 구워주시며 우리와 얘길 하러 오시던 청년분들, 마을잔치 땐 삼겹살을 한 푸대 던져 주신 통크신 마을 주체님. 으흠. 갑자기 그리워지는군.

중간에 선전전을 하다가 연행된 학우들도 있었다. 또 낚시꾼으로 위장한 사복형사들은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미리 와 있었다. 그렇게 1주일. 마지막 날에 영흥도를 떠날 때는 그 사이 정이 들어 눈물이 날려고 했다. 많은 분들이 투쟁하시고 계시지만 특히 할머니들의 모습은 정말 잊을 수 없다. 눈물을 흘리시며 박수를 쳐 주시던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허리가 완전히 굽었는데도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하시던 할머니. 답동에서 성당에 침투한 사복 형사를 몰아낸 할머니들, 어떤 학생 운동가보다도 연설을 더 멋있게 조리있게 하시며 비열한 형사들, 한전을 생각하면 잠이 안온다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슴에 고이 고이 담아 왔다. 누구도 그들을 건드려선 안된다.

마지막 전국의 환활대가 영흥도로 들어오기로 한 날은 무척 기대를 했었는데 경찰의 원천봉쇄로 실패했고 대신 영흥도 환활대가 인천으로 나가서 인하대를 중심으로 인천 시내 곳곳을 누비며 선전전을 했다. 오랜만에 도로에서 뛰어도 보고.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정말 힘이 났다. 전국에서, 조국 땅덩어리가 자본에 의해 파괴 당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 갔다 온 전국 곳곳의 환활대가 모인 것을 보니 우리의 투쟁이 그렇게 고립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또 가슴이 찌잉~.

서울에 와서 갈릴리 만찬과 팥빙수 그리고 막걸리까지 뒤풀이를 걸판지게 하고서야 환활 일정은 무사히 끝이 났고 새까맣게 홀랑 타서 돌아와 학생회관 식구 얼굴들을 보니 왜 그렇게 희게 보이던지.

휴... 길군. 이제 정리를 해야겠다.

환경활동. 굳이 농활과 다른 축으로 행한다는 건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 농활을 접을 시기가 아닌데,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농활을 수행하는 자세가 관성화되었다는 이유만이라면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농활이 제대로 수행된다면 환활처럼 지역의 특수성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쨌건 간호대는 그렇게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전에 들은 소식으로는 우리가 일을 한 집. 구속자분께 징역 5년이 떨어졌다고 한다. 신문엔 영흥도 화력발전소 건설을 인천시가 중단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이제 시작이다. 화력발전소 건설 계획을 완전히 철회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영흥 모든 주민들에게 철저히 보상할 때까지 귀찮게 따라다니며 투쟁하는 일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위에 사람없고 화전 위에 생명없다! 라는 구호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