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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사회/기술

독일 녹색당의 역사

저자를 알수 없는 것이 조금 안타깝지만, 내용은 잘 정리되어 있다.

출처 : http://samin21.jinbo.net/maybbs/view.php?db=samin21&code=open_debate&n=167&page=12


제목: 독일 녹색당의 역사

독일에 와서 독일의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국유학생에게 가장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은 역시 녹색당이라는 미니정당이 독일의 정치에서 수행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지지율이 10%도 안 될 때가 많고 의석수도
그렇게 많지 않지만, 독일의 대학생이나 지식층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이 꼬마정당은 "한국에도 저런 정당이 있었으면"하는 부러움을 자아내게
하는 청년/지식인/여성 정당이며, 이미 미디어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독일의
정치현실에서 가장 재치있고 지적인 남녀논객들을 보유하고 있는 정당으로서
오늘날 독일정치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녹색당의 오늘날 정식 당명은 "Buendnis 90/Die Gruenen"이다. 1993년
동독의 민권운동단체인 "Buendnis 90"과 서독의 진보정당인 "Die Gruenen"이
통합함으로써 만들어진 "Buendnis 90/Die Gruenen"이 오늘날 녹색당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Buendnis 90/Die Gruenen"의 진정한 모태는 어디까지나 "Die
Gruenen"이지 "Buendnis 90"에 있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가급적 "Die
Gruenen"을 중심으로 독일녹색당의 역사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녹색당의 출발은 1970년대에 서독 곳곳에서 일어났던 시민운동단체와 기타 원외
정치단체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각각 수많은 상이한 관심사와 목적을
갖고 있던 이들 단체들은 환경보호운동, 반핵운동에서 국제적 군축운동 그리고
기존 경제 및 사회질서의 근본적인 변혁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정치적 지향점은 대체로 중도에서 좌익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그 연원
역시 1968년에 정점을 이루었던 학생운동의 비제도권적 원외투쟁의 전통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우선 1977년 11월에 니더작센에서 "die Gruene Liste Umweltschutz
(GLU)"라는 단체를 설립한 후, 이를 곧 서독 전체 규모로 확장시켰다. 그밖에도
수많은 군소단체들이 이 GLU와 정치적 연합을 결의하면서 1978년 10월에는 드디어
수많은 그룹들이 "Die Gruenen"이라는 이름 아래 뭉쳐서 바이에른 지방선거에
참여하게 된다. 1979년 3월에는 이들 "Die Gruenen"이 유럽의회선거에 Petra
Kelly (사진) 등을 후보로 공동참여하여 3,2퍼센트라는 꽤 괜찮은 득표율을
올리고, 1979년 10월 브레멘 시의원선거에서는 드디어 녹색당 역사상 최초의
의석을 쟁취한다(참고로 브레멘은 함부르크와 함께 독일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좌파 도시이다). 그리고 1980년 1월 12일과 13일 Karlsruhe에서 열린 최초의
전당대회에서 이들은 서독 전체를 포괄하는 공식 정당으로 발족하기에 이른다. 


좌파 사회주의 그룹에서 아나키스트, 그리고 다분히 정치적으로 별다른 색깔이
없는 환경운동가들까지 워낙 여러가지 정치적 색깔을 가진 군소단체들이 모인
정당이었기 때문에 이 녹색당의 정강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매우 격렬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당의 주도권은 결국 좌파들이 장악을 하고 우파들은 점차로
당을 떠나기 시작하며, 그 정강 속에서 녹색당은 그들의 정책을 "환경적이고,
사회적이고, 풀뿌리 민주주의적이고 비폭력적인"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극좌폭력주의와는 거리를 둔 채, 그러면서도 좌파적 관점에서 기성정당에 대한
대안세력으로 자리할 것임을 선언하게 된다. 


그 직전에 녹색당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선거에서 5,3퍼센트의 지지율을
획득한다. 물론 1980년 10월의 독일총선에서는 겨우 1,5퍼센트의 득표율에
그치지만, 1982년의 헤쎈주 지방선거에서는 8퍼센트라는 놀랄만한 득표율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비록 이때 헤쎈주 사민당은 녹색당과의 연정을 끝내 거부하고
말아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로써 녹색당은 독일
정치무대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실체로 떠오르게 된다. 


사실 이러한 녹색당의 약진에는 당시 자민당(FDP)의 사민당에 대한 배신도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1982년까지 사민당과 함께 사회주의/자유주의 연정을
이루어 13년간 서독에 좌파정권을 유지시키고 있던 서독 자민당은 1982년
사민당의 고용정책과 사회보장정책에 반대하면서 Hans-Dietrich Genscher와 Otto
Graf Lambsdorff의 주도로 사민당과의 13년 우정을 배신하고 Helmut Kohl의
기민/기사련에 달라붙어 Helmut Schmidt의 사민당정권을 종식시켰는데, 이것이
자민당 지지층들의 염증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배신행위는 독일의 제3당 자민당의 분열을 가져와 자민당 좌파의 대규모
탈당사태를 가져왔고, 자민당 사무총장 Guenther Verheugen 등은 이제 야당으로
전락해버린 사민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리고 신뢰성을 상실해버린 자민당에 대해
서독국민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해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자민당은 득표율
5%의 벽조차도 넘지 못하게 되었고 (독일에서는 득표율 5%의 벽을 넘지 못한
군소정당의 경우 의회에서 의석을 배분받지 못한다) 그동안 자민당에 표를 던지던
고정지지층의 일부(자유주의적 성향의 좌파그룹)는 녹색당으로 상당부분 기대와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83년 3월의 총선에서 5,6퍼센트의 득표율을 올린 녹색당은 이제
연방의회에서 27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당대표의 자리에는 Petra Kelly, Otto
Schilly가 임명되었고, 사무총장에는 Joschka Fischer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 초창기 녹색당 지도자들의 면면을 짤막히 소개하면, 초기 녹색당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였던 Petra Kelly는 유럽의회활동을 하면서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으로 명성을 쌓아온 미모의 국제적 명망가였고, Otto Schily(사진
오른쪽)는 과거 학생운동 지도자와 적군파의 변호활동으로 유명했던
인권변호사였으며 (Hamburg 법대출신이기도 하다), Joschka Fischer(사진 왼쪽)는
Rudi Dutschke, Daniel Cohn-Bendit와 함께 1968년도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운동권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비단 Petra Kelly뿐만 아니라 녹색당의 지도자그룹 가운데에는 초기부터 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1984년에 구성된 당 최고위원회의 경우는 순전히 여성으로만
구성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녹색당의 전당대회에는 각 지구당이
일정인원을 선출해서 대표를 참가시키는데 그 인원 역시 최소한 50%는 여성으로
채워져야 하며 (그래서 녹색당 전당대회 장면 같은 거 TV로 보면 순 여자들
판이다), 그 밖에도 전통적으로 녹색당의 당지도부를 구성하는 2명의 당대표직과
당연방재정국장 및 정치국장의 자리 또한 거의 항상 절반은 여성들로 채워졌다.
이런 이유로 녹색당은 오늘날 "여성의 정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1984년에 치러진 유럽의회선거에서 녹색당은 8,2퍼센트의 득표율을 올린다.
그러한 주목할 만한 성과 이후에 녹색당에는 과연 사민당이 주도하는 주정부에
연정파트너로서 참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보수정당인
기민/기사련이라면 몰라도 중도좌파인 사민당 정도라면 기본적으로 좌파정당인
녹색당과 정치적 색깔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84년 12월
전당대회에서 녹색당은 연방차원에서라면 몰라도 주정부차원에서라면 사민당에
연대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1985년 6월
원칙론자들(Fundis)이 거세게 반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현실론자(Realos)들이
결국은 승리하여 다시금 "정부에 참가하는 것도 우리 정당사업에 당연한 일부가
된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그에 따라 1985년 10월에는 헤쎈주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이 이루어져서 당시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하여튼 엄청 뚱뚱해져
있던 Joschka Fischer가 녹색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장관(헤쎈주 환경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86년 초에는 Jutta Ditfurth, Rainer Trampert를 중심으로 한 원칙론자들과
Petra Kelly, Joschka Fischer, Otto Schilly, Antje Vollmer를 중심으로 한
현실론자들 간의 갈등이 더욱 악화돼 결국 양 정파가 서로 독립된 모임을 갖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녹색당의 상징적 얼굴이었던 Petra
Kelly는 녹색당의 전통적인 당직/의원직 분리원칙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원칙론자들에게 집중공격을 받게 된다 (그때의 충격으로 이 미모의 똑똑한 여자는
정신병을 얻게 된다). 1987년 1월 연방총선에서 녹색당은 내부분란에도 불구하고
8,3퍼센트의 경이적인 득표율을 올리지만 1987년 2월 헤쎈 녹색당은 핵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헤쎈 사민당과의 연정에서 쫓겨나고 만다. 


1987년말에는 노선분쟁이 더욱 악화되어 Otto Schily가 공공연히 탈당을
고려한다고까지 발언했다. 물론 당지도부는 당분열의 소문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당내부에서는 현실정치적 그룹인 "Aufbruch" "Kritische Realos"
"Linkes Forum"과 원칙론자 그룹인 "환경사회주의자" "급진환경론자" 그룹간의
내부앙금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급기야 1989년 11월에는 그칠 날 없는
당내 원칙론자와의 갈등에 책임을 지고 Otto Schily가 공식적으로 당을
떠나버렸다 (이후 그는 사민당에 들어가 오히려 더욱 승승장구하여 1998년에는
수상 슈뢰더 밑에서 내무부장관으로 취임, 오늘날까지 그 장관직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녹색당은 계속 당세를 확장하여 1989년 1월에는
베를린지방선거에서 11,8퍼센트라는, 당창립 이래 최고의 득표율을 올리고서
베를린사민당과 연정에 들어간다 (물론 1990년 11월에 다시 깨지지만). 1990년
3월에는 니더작센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니더작센사민당정부에
연정파트너로 참여하여, 1994년까지 꽤 오랜 기간동안 니더작센에서 적녹연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일통일의 과정에 대한 극복불가능한 견해차이로 인해 1990년
4월에는 Rainer Trampert를 비롯한 여러명의 "환경사회주의자"들이 녹색당을
떠나버린다. 그의 뒤를 따라 "Linkes Forum"의 몇몇 멤버들까지 녹색당을
탈당해버린다. 당지도부는 단결과 이성적 제휴를 간절히 촉구했지만 녹색당의
이미지는 이러한 분열상과 Helmut Kohl정부의 통일정책(1989년~1990년 당시
독일국민들 사이에 통일수상 헬무트 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인해 손상되고, 결국 1990년 12월 독일통일후 처음으로 치러진
연방총선에서 녹색당은 5퍼센트의 벽조차 넘지 못해 연방의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녹색당은 동독의 5개주에서 "Buendnis 90"과 연대함으로써 겨우
지지율을 6퍼센트로 만들었다. 군소정당이 난립한 동독지역의 특례에 의해 꼭
5퍼센트를 못 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당과 연합하면 의회에 진입할 수 있다고
돼있던 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이로써 녹색당은 "Buendnis 90"과 연대함으로써
간신히 연방의회에 진입하게 된다. 


1991년 4월의 전당대회에서는 선거참패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어 녹색당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당지도위원회는 효율적으로 개편되고 이에 반대하던 Jutta
Ditfurth를 중심으로 한 "급진환경론자"들은 당을 떠나버린다. (이 과정에서 크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녹색당의 상징' Petra Kelly는 이후 1992년 10월 1일 그녀의
자택에서 일생에 동반자였던 Gert Bastian과 함께 권총 자살한 비참한 시체로
발견된다.) 


1991년 9월에는 여태껏 동독내 시민운동단체들(예를 들어 그 유명한 "Neues
Forum" "Demokratie Jetzt" 등등)의 연합에 불과했던 "Buendnis 90"이 공식
정당으로 출범하고, 1992년 11월에는 "Die Gruenen"과 합당을 한다. 이로써
녹색당은 "Buendnis 90/Die Gruenen"으로 당명을 바꾸고 새로운 탄생을 하게
된다. 


1991년 1월 헤쎈주 지방선거에서는 다시 녹색당이 좋은 성적을 거두어 헤쎈주에서
새롭게 적녹연정이 구성되었다. 1991년 9월에는 브레멘에서, 1994년 7월에는
작센-안할트에서 각각 적녹연정이 구성되고, 1994년 10월의 연방총선에서는
녹색당이 7,3퍼센트의 득표율을 거두어 자민당을 제치고 독일내 제3정당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당대표에는 Joschka Fischer와 Kerstin Mueller가 임명되었고,
Antje Vollmer는 연방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95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지방선거에서는 10퍼센트를 득표하여 역시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게 된다. 1996년 3월 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
지방선거에서도 8,1퍼센트를 득표하여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한다. 1997년 9월의
함부르크 시의원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적녹연정이 구성되어 독일 북부지방 거의
대부분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정권을 장악해 연방의 기민/기사련 정부에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녹색당은 1998년 3월 마그데부르크에서 휘발유가격을
리터당 5마르크로 인상할 것을 요구하는 정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독일
전국에서 자가용승용차 사용자들의 불같은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프로그램은 철회되었으며, 에너지가격을 전반적으로 인상하자는 쪽으로 완화되고
만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그데부르크강령에서는 연방방위군이 국제평화유지군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으나, 인권단체들의 비난에 부딪치자 보스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적 살육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국제평화유지활동을 펼칠 수
있다는 쪽으로 강령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녹색당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추종하는 군사기구인 NATO를 해체하라고 주장했었는데, 이 역시도 완화되어 NATO
회원국이 동구권 국가에로까지 확장되는 것만을 반대하는 쪽으로 타협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극단적인 환경보호정책 대신에 녹색당의 선거전략 중심에는 새로이
실업문제의 해결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휘발유가격을 인상하여 자가용승용차
사용자들을 자극하기 보다는 이제 녹색당원들도 핵폐기물 문제에 환경정책의
타겟을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전략의 배경에는 당시 독일 전국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핵폐기물 저장소(Castor-Behaelter)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올 총선에서 기민/기사련/자민당의 연정을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현실적
당위성도 있어서, 이제 녹색당은 드디어 연방 차원에서도 사민당과의 연정을 위해
자기들의 주장을 대폭 양보하려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타협을 바탕으로 1998년 9월 연방총선에서 녹색당은 6,7퍼센트라는 그리
나쁘지 않은 득표율로 자민당(FDP)를 앞서 제3당의 위치를 고수하며 총선승자인
사민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다. 제2차대전후 독일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사민당과 함께 실현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국민정당이었던 사민당과 연정을 하기 위해서, 녹색당은 외국인피난민 보호문제,
원자력발전소 철거문제, 에너지세 문제 등에 있어서 기존의 입장을 많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Gerhard Schroeder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에서 녹색당은 세 명의
장관자리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 자리에는 연방부수상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Joschka Fischer(그 사이 다이어트와 달리기운동으로 살을 빼서 날씬해졌다)가,
환경부장관으로서 Juergen Trittin이, 그리고 보건부장관으로서 Andrea Fischer가
들어앉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됨으로써 녹색당은 내부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안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권당의 일부로서 당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구조개혁을 어느
정도까지 추진해야 할 것인가와 함께, 기존의 녹색당 정책을 양보하는 과정에서
당지도부와 내각참여자들, 그리고 기층당원들 사이에 발생한 이견과 갈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당대표를 2명씩 두는 기존의 시스템은 유지되었지만,
평의회(Parteirat)라는 새로운 기구가 제도화되어 당지도부와 기층당원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게 되었고, 녹색당이 전통적으로 엄수하고 있던 각료직과
당직의 분리원칙 역시 조금 완화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환경부장관에
취임했던 Juergen Trittin의 경우 어쨌든 당대표직을 사임했으며, 그 자리는
Antje Radcke가 이어받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당평의회에서는 장관인 Trittin이
위원으로 참가하여 당직을 겸직하게 된 게 그 예이다. 


기층당원과 녹색당지지자 그리고 연정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집행된
녹색당 지도자들의 정치적 입장 사이에 일어난 괴리는 1999년 2월 헤쎈주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의 참패를 야기했다(11,2퍼센트에서 7,2퍼센트로 득표율이
급락함). 이로써 가장 오랫동안 녹색당이 강세를 보였던 지방인 헤쎈주는
기민련/자민당의 보수자유주의 연정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녹색당 당원들은 당지도부가 연립정부 속에서 자기 의사를 충분히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환경부장관 Juergen Trittin에
대해서는 원자력발전소 철거문제에서 공해산업세력에게 패배하고 말았다는 불평이
쏟아지게 되었다. 


거기에 연방부수상이자 외무부장관인 Joschka Fischer가 연방방위군 및 NATO의
코소보전쟁 참가를 동의해 독일정부의 막대한 예산을 유고슬라비아내전 진압을
위해 쏟아붓게 하면서 당의 내분은 더욱 심각해지게 되었다. 당지도부가 이러한
코소보 참전을 휴머니즘적인 이유로 옹호한 반면, 기층당원들은 이러한
전쟁놀음이 녹색당의 전통적인 평화주의, 반전주의 입장에 배치된다고 보았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분은 1999년 3월 24일 전당대회에서 코소보전
참가가 압도적 다수로 승인되면서 약간 잦아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Fischer는 어느 좌익 테러분자에게 페인트달걀을 맞아 한쪽 귀의 고막이 터지는
등 수난을 당한다.) 


그러다가 지난 2001년 1월에는 Joschka Fischer의 과거 운동권 경력이 구설수에
올랐다. Hans Joachim Klein이라는 테러리스트가 체포되면서 그가 Fischer와
폭력적 지하조직을 같이 했는지, 그러한 테러리스트들의 무기를 Fischer가 자기
집에다 숨겨주었는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Fischer가 1973년
무장한 경찰관에게 쫓기다가 갑자기 휙 돌아서서 경찰관을 주먹으로 때린 사실이
사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Fischer는 기민/기사련으로부터 '비폭력 문명사회,
법치국가의 대표자로서 자격이 없다. 당장 공직에서 사퇴하라'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Fischer는 1월 17일 하원에서 자기 경력에 대해 해명을 했다. 자신이
한때 어느 정도 폭력을 용인했었던 것은 '근본적인 오류'였으며, 이미 1977년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고 확신에 의해 비폭력주의자로
자기 견해를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폭력적 지하조직에는 가담한 적이 없고,
화염병도 던진 적이 없으며, 테러리스트의 무기를 숨겨준 적도 없지만, 자신이
구타한 경찰관에 대해서는 사과를 한다고 밝혔다. 그 뒤로 Fischer는 수차례
이런저런 자리에 끌려나가 그 사실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고, 반복해서 자기가
경찰관을 때린 데 대해 사과했다. 그러자 독일국민들은 압도적인 숫자로
Fischer가 그만큼 사과했으면 된 것이라고 Fischer를 두둔해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조선일보는 2월 3일자 '만물상'에서 "세계 제3의
경제 강국에서 제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직자가 과거 전투적인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관을 돌로 공격한 폭력전과자라는 것이 ...
폭력을「설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바 있는 사람을
법치국가의 외무장관 자리에 그대로 놓아둘 수 있느냐... 피셔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은 젊었던 시절 한 때의 「방황」으로 돌리면서「회개」를 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 주변에서는 이순의 나이에서도 여전히(아니면 뒤늦게)「왼쪽 사상」에
연연하는 지식인들이 남아있다는..." 등등으로 보도논평했다. 물론 Fischer는
'돌로 공격'한 것이 아니라 맨손으로 반격한 것이며, 우발적으로 폭력을 썼을
뿐이지 폭력을 '설교'한 적도 없고, 자신의 부분적 폭력용인에 대해 과오를
인정했을 뿐이지, 자신의 과거사 전체와 자신의 좌파적 성향에 대해 '한때의
방황으로 돌리면서 회개'한 적도 없다.) 


거기다 지난 3월에는 환경부 장관인 Juergen Trittin이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독일의 기민련 사무총장인 Meyer가 "나는 내가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Ich bin darauf stolz, ein Deutscher zu sein)"라는 발언을 한 걸
가지고 Trittin이 "마이어의 발언은 스킨헤드의 멘탈리태트를 바탕에 깔고 있다.
비단 그의 대머리만 스킨헤드스러운 게 아니다"라고 비판한 것이 애국심과 품위를
결여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어 기민/기사련/자민당으로부터 장관직 사퇴를
요구받게 된 것이었다. 


물론 트리틴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자기 발언이 인신공격의 양상을 보인 데
대해서만 사과를 했을 뿐 독일민족에 대한 자부심 운운을 비판한 것은 결코
사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격앙된
기민/기사련/자민당은 더욱 더 거세게 트리틴의 퇴진을 요구했고 신나찌들과
연대해서 서명운동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포스터에는 "우리는
독일인이라는 데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우리 독일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등등의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인 요하네스 라우(사민당 소속)가 트리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인간이란 자기가 직접 한 일에 대해서만 자랑스러울 수
있다. 일개인이 우연히 자기가 태어나서 속했을 뿐인 자기 국가에 대해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라 옹호하고, 독일국민들이 대체로
Trittin이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Trittin의 편을 들어 대충 무마되었지만,
이로써 녹색당은 이념적으로 너무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되어 지지도가
더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녹색당 당원들은 Joschka Fischer의 타협적
태도를 거칠게 비난하며 반란의 조짐까지 보였고, 이런 속에서 새로 당수로
취임한 Claudia Roth (아래 사진)는 '녹색당의 정신'과 함께 급진적인 개혁의
비타협적 관철을 주장하며 Fischer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주 일어났던 녹색당의 이러한 구설수와 극단적 분열,
내부갈등은 기민/기사련이나 사민당, 자민당과 같은 기성정당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꼴사나운 모습은 독일국민들로 하여금
녹색당의 수권능력을 항상 의심케 하곤 했으며, 다른 어느 당보다도 다재다능한
젊은 인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녹색당이 유권자들로부터 충분한 득표를
하지 못하는 데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많은 주정부에 녹색당이 사민당의 연정파트너로 참가하면서 그 내각
속에서 녹색당 각료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임무를 잘 수행해왔다는 사실만 보아도
녹색당의 수권능력에 대한 의심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 말할 수밖에 없다. 특히
1998년 연방정부에 참가한 뒤로 녹색당의 각료들은 기대 이상의 행정역량을
보이면서 꼭 트러블메이커라고 해서 조직을 잘 이끌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녹색당의 당원수는 1998년 현재 5만명이다. 사민당이나 기민/기사련에 비하면 그
숫자가 매우 적지만, 각 대학 운동권 학생들의 숫자를 보면 청년녹색당그룹이
거의 어디서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민당계열 학생그룹(JUSO)이나
기민련계열 학생그룹(RCDS)을 그 숫자 및 열성도에서 월등하게 압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대학교 학생회의 경우도 녹색당계열의 우위는 뚜렷하며 그
결과 함부르크대학교 법과대학 화장실 소변기는 수자원을 낭비하는 수세식 대신
냄새나는 비수세식으로 만들어져 환경보호에 이바지하고 있다. (불쌍하게
생각되는가? 익숙해지면 괜찮다. 깨끗한 화장실이 그렇게 좋으시거든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남부지방으로 유학가시라.) 함부르크대학교 학생식당도 철저히
자연농축산물만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음식값이 다른 대학교보다 좀 더
비싸다. 


오늘날 녹색당은 연정에 참여하면서 환경세를 도입하고, 자동차 휘발유 가격을
점차로 인상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단계적으로 완전폐기하는 데 정부와
에너지사업체의 동의를 얻어내는 등 꾸준히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특히 오늘날 독일 전역에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는 시점에서 녹색당은 가장
과감하게 극우파 반대입장을 표명해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 결과 은근히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독일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아 요 근래 지방선거에서 약간
고전하고는 있지만, '연정내에 악역을 도맡아 한다'는 이유로 독일의
지성들로부터는 오히려 더욱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독일 녹색당을 볼 때면 우리나라 학생운동권이나 좌파지식인들은 너무나 과거의
경직된 사고방식에 얽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더이상
노동문제와 계급문제만이 진보역량의 결집에 있어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없고, 환경보호운동, 반핵운동, 여성운동, 진보적 학술운동,
악법개정운동 등 현재의 복합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풍부한 방법론들이
여기저기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많은 진보적 잇슈들을 충분히
개발하거나 흡수하지 못한 채 당을 만들어도 '민주노동당' 같이 구태의연한
모습의 당을 만들거나 아니면 그냥 기성정당에 백기 들고 투항하는 모습들만을
보이고 있는 게 우리나라 진보인사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변해가듯 세상도 끊임없이 변해간다. 언제까지나 젊었을 때의
원칙만 고수하고 살 수도 없고, 자기가 소수에 속함을 안다면 소수에 걸맞는 몫을
하면서도 때로는 현실과 타협하고 살 수도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야합할 수는 없다. 일단은 자기와 정체성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뭉쳐서 무슨 일을 벌여도 벌여본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일 녹색당은 일순간에 혁명적으로 세상을 뒤집겠다는 순진한 꿈 따위는
애초부터 과감히 버렸고, 그렇다고 기성정치권의 품 안에 양자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자기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밑바닥부터 자기들끼리
차근차근 힘을 길러서 결국 현실 속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 정권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현실적이면서도 창조적인 노력을 우리도 많이
본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나는 이곳 독일땅에서 빈번히 가져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