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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한국환경운동사 6 - '작은 섬에 울려퍼진 클레멘타인'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

 

<한국환경운동사 기획연재>

1. 최초의 반공해투쟁 - 온산주민투쟁 (`84-`85)

2.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진폐증 사건

3.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투쟁(`88-`89)

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5. 대구 페놀 사건(`91)

6.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4-`95)

7. 동강 댐 건설 반대운동(`98-`99)

8. 돌이켜 보는 80-90년대 환경운동


작은 섬에 울려퍼진 클레멘타인

-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94-`95) -


청년환경센터(준) 대표 이헌석(LEEHS1@chollian.net)


“덕적이라 하늘에는 별도별도 많지만, 반짝반짝 전깃불은 하나 볼 수 없어라,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덕적도 잘 자라고 잘 배워서 우리 섬을 깨우세”

- 덕적도 투쟁 당시 주민들이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에 맞춰 부르던 덕적도가(歌) -


연말 연시, 핵 폐기장 발표

90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이 93년까지 이어지면서 정부는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사실상 추진하지 못하게 된다. 안면도에서의 계속된 지역주민들의 반대는 정부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큰 부담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TV에서는 이정길이 “핵폐기장 건설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라는 광고를 계속하고 있었고, 핵폐기장 후보지가 곧 결정될 것이라는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던 중 94년 12월 15일 서해 앞 바다 굴업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지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굴업도로 모아지게 된다. 당시 굴업도 주민은 9명. 너무나 적은 주민 수 때문에 굴업도 주민들의 반대운동이란 사실상 불가능했고, 정부에서는 연말이라는 기간의 특성상 어수선한 틈을 타 확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덕적도 주민들의 모진 투쟁

하지만 예상과 달리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은 바로 옆에 있는 섬 덕적도에서 시작되었다. 굴업도를 지척에 두고 있는 섬 덕적도는 인구수에서는 굴업도 보다 큰 섬이었지만, 작은 섬이긴 마찬가지였다. 안면도 반대투쟁 당시 섬이라는 지형은 연육교를 중심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투쟁하기 좋은 지형이었지만, 덕적도와 같이 작은 섬은 봉쇄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안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은 고립된 섬을 빠져나와 인천과 서울을 오고가며, 반대시위를 벌였다.

12월 15일 언론보도, 17일 덕적도에 500억 투자 발표, 22일 정부의 공식 확정 발표… 정부는 1주일 동안 일사천리로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다. 겨울인데다가 크리스마스와 연초가 되면 아무래도 지역주민들의 집회와 시위가 힘들지 않겠냐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덕적도 주민들은 몰려 나왔다. 22일 정부의 확정 발표가 있고 바로 다음날인 23일 서울에서의 집회를 비롯, 덕적도 주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집회를 인천과 서울에서 벌여냈다. 조용한 섬에서 살아가던 덕적도 주민들에게 집회와 시위 그리고 전경과 최루탄은 결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시위에 참가하시던 할머니의 죽음, 5월 20일 폭력 진압으로 인한 50-60명 부상 사태, 환경운동가들에 대한 “빨갱이, 불순세력” 운운 등 덕적도 주민들의 처절한 싸움은 95년 지자체 선거를 넘기면서 까지도 계속 진행되었다.


어이없는 발표로 끝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

94년 12월에 시작된 덕적도 주민들의 투쟁은 인천 연안부두, 동인천역, 인천시민회관, 서울 정부종합청사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되었고, 한전 건물에서의 반핵 플랭카드 시위 등 적극적 선전방식, 95년 지자체 선거에서덕적면 반대투쟁위원회 사무국장이 군의원후보로 나와 찬핵-반핵 대결 등 핵폐기장 건설 반대를 위한 다각적인 투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 비해 그 결말은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었다. 당초 정부에서는 굴업도가 1) 지질구조가 단단해서 안전하며 2) 수심이 깊어 항만을 짓기 용이하고 3) 주민 수가 적어 반대가 적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이유인 지질 구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91년도에 정부에서 지질조사 이후 부적격지로 건설 검토가 전면 백지화된 이후에 다시 굴업도가 선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환경단체들에서 문제제기한 바 있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했었으나, 결국에는 이것이 문제되었다. 굴업도에 대해 지질조사를 다시 하던 중 활성단층이 발견된 것이다. 핵폐기물 처리장은 매우 오랜 시간동안 안정된 공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활성단층이 있다는 것은 언제 핵폐기물이 생태계로 누출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95년 11월 30일의 일이다.


또 하나의 승리한 투쟁, 그리고 많은 성과들

1년동안 덕적도와 인천, 서울을 오고가며 진행했던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쯤 우리나라는 활성단층 위에 지어진(위험한) 핵폐기장이 있을 것이다. 안면도 투쟁과 함께 대표적인 승리한 반핵 투쟁으로 기록되는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환경문제를 지역의 문제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킨 의미들을 지닌다. “자본주의 문제로서의 환경문제”, “핵자본에 대한 분석”등은 굴업도 투쟁을 거치면서 전면적으로 나온 문제의식들이며, “반핵농활”(환경현장활동의 전신), 활발한 “반핵퍼포먼스”, 학생환경운동 등 역시 95년을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즉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이를 구현하는 형식에 대한 고민들이 보다 광범위하게 만들어진 계기가 된 것이 굴업도 투쟁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90년대 후반 안착화된 시민운동의 경향들과 대별되는 흐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