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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경운동사 3 - '핵발전소 강제건설, 미국은 각성하라!' 계속되는 방사능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운동



대학생신문 2000년 4월 4일자

<한국환경운동사 기획연재>

1. 최초의 반공해투쟁 - 온산주민투쟁 (`84-`85)

2.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진폐증 사건

3.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투쟁(`88-`89)

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5. 대구 페놀 사건(`91)

6.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4-`95)

7. 동강 댐 건설 반대운동(`98-`99)

8. 돌이켜 보는 80-90년대 환경운동


핵발전소 강제건설, 미국은 각성하라!!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운동(`88-`89)


청년환경센터(준) 대표 이헌석


반핵운동의 시초 - 영광 핵발전소 피해보상운동

한국환경운동사에서 반핵운동은 결코 빼 놓을 수 없다. 자천타천으로 ‘운동’이라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의 환경단체가 반핵운동을 뿌리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반핵운동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 만큼 다른 환경사안에 비해 반핵운동이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으며, 오래된 사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핵운동이 한국환경운동사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78년 고리 핵발전소를 시작으로 월성, 울진, 영광 등에 핵발전소가 들어설 당시에는 산업화?공업화 이데올로기에 밀려 소수의 지식인층을 제외하고는 핵발전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였으며, 일부 진행된 반핵운동도 ‘핵무기 반대?군비축소’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던 중 85년 ‘가미미 관광 및 어업피해 보상투쟁위원회’를 시작으로 88년 ‘성산리 생계 및 이주대책위원회’ 등 피해보상을 위한 지역주민단체가 건설되면서 반핵운동의 시초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피해보상운동은 ‘핵발전소 반대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지만, 핵발전소로 인한 피해를 집단적으로 문제제기 한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80년대 초반의 엄혹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정부에 대한 이러한 항의 표시마져도 어려웠던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핵발전소 신규건설

피해보상운동이 시작되던 88년에서 89년까지의 2년간은 사상 유래 없는 핵발전소 피해가 이어지고, 정부의 핵발전 정책이 더욱 확고화되던 때이다.

88년 10월 발생한 박신우씨(당시 48세, 고리핵발전소 10년 근무, 한전기술안전 총괄부장)의 임파선암 사망사건, 89년 6월 고리핵발전소 노동자 방윤동씨(당시 29세, (주)한전보수 기능보조원 근무 중 피폭) 위암사망 사건, 89년 7월 영광 핵발전소 일용노동자 김익성씨 무뇌아 사산, 89년 8월 영광핵발전소 일용노동자 김동필씨 기형아 출산, 고리핵발전소 인근 잠수부 김방규(당시 41세)씨의 부인이 2명의 기형아를 낳은지 1년안에 모두 사망한 사건, 89년 8월 고리 핵발전소 인근 효암리에서 1년동안 사망한 주민 8명의 사인이 모두 암으로 밝혀진 건 등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핵발전소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정부의 핵발전소 11, 12호기(영광 3,4호기 - 당시에는 고리 1호기부터 건설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여갔다.) 건설 계획 추진으로 인해 영광주민들을 비롯한 전국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러한 열기를 반영하듯, 89년 4월에는 최초의 반핵운동연대체인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약칭 전핵추본)’가 건설되어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활발히 벌인다. 전핵추본은 환경?사회단체?학생?지역주민조직이 연대하여 만든 최초의 반핵운동연대체로 반핵운동을 전국적 투쟁으로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전핵추본이 89년 9월부터 12월까지 펼친 ‘핵발전소 11, 12호기 건설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은 전국적으로 12만명의 서명을 받는 등 전국적 투쟁으로 반핵운동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반핵운동의 다양한 세력들

한편 영광의 반핵운동은 이후에 나타나는 다른 지역의 반대 운동과 다른 양상을 많이 보여준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반대 슬로건이다.

“핵발전소 강제건설, 미국은 각성하라!!”, “양키 고 홈(yankee go home)!!”

요즘 반핵집회에서는 듣기 힘든 구호들이지만, 당시 영광 주민들의 집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 영광지역의 반핵운동은 이처럼 다른 지역과 달리, 당시 민중운동의 직접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지역적 특성이외에도 총학생회, 농민회와 같은 민중운동 세력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으로 다른 지역의 반핵운동이 자생적인 지역주민조직으로만 투쟁이 만들어져 온 것과는 구별되는 지점이다. 물론 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이런 이념적 색채는 많이 퇴색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반핵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 - 정계진출 등 자신의 정치적 입지강화를 위해 반핵운동을 이용하는 보수주의적 반핵운동, 다른 지역의 반핵운동에서 흔히 나타나는 비정치적?자생적 주민조직에 의한 반핵운동,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잡아가는 시민환경운동, 9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나는 반자본주의적 좌파 반핵운동 -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를 보여준다.


그 날 이후 싸움은 아직도 계속된다.

88-89년을 고비로 94년까지 계속된 11,12호기 건설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현재 영광 3,4호기는 가동되고 있다. 당시 문제 제기했던 짜집기 핵발전소의 문제는 계속된 핵발전소 가동 중지로 사실임이 들어났고, 영광 어민들은 또 다른 발전소인 영광 5,6호기의 온배수 문제로 상경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정부측이 가지고 있던 2030년까지 50기의 핵발전소 건설 계획은 2015년까지 12기(건설 중 4기, 신규 8기)의 핵발전소 건설계획으로 바뀌어 여전히 추진되고 있다. 작년부터 시작된 울산?울진 핵발전소 반대운동에서 보이듯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전국 곳곳에서 아직도 계속 벌어지고 있으며, 반핵운동진영은 아직도 ‘핵발전 정책 철회’를 주요 슬로건으로 외치고 있다. 10여년 이상 계속된 싸움, 끝도 없이 계속 되는 싸움은 90년대를 넘어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