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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경운동사 2 - '이렇게 죽어가기에는 너무 억울합니다'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진폐증 사건

 


대학생신문 2000년 3월 21일자

<한국환경운동사 기획연재>

1. 최초의 반공해투쟁 - 온산주민투쟁 (`84-`85)

2.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진폐증 사건

3.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투쟁(`88-`89)

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5. 대구 페놀 사건(`91)

6.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4-`95)

7. 동강 댐 건설 반대운동(`98-`99)

8. 돌이켜 보는 80-90년대 환경운동


이렇게 죽어가기에는 너무 억울합니다.

-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박길래씨 사건-


청년환경센터(준) 대표 이헌석

어느 아주머니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저는 1943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작은 아버님 댁에서 자랐습니다.…… 16세 때 단신으로 서울에 상경하여 열심히 일해 떳떳하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고생을 마다 않고 일해 왔습니다. …… (박길래씨 수기 중에서)”

영화에나 나오는 듯한 이야기지만, 6?25 전후에 태어난 민초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만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렵게 서울에 올라와 한푼씩 모으며, 잘사는 꿈을 키워간 민초들에게는 편안한 집도 쾌적한 환경도 기대할 수 없었다.

“성북구 동소문동에 전셋집을 얻어 살다가 1979년도에는 중랑구 상봉동에 조그마한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부터는 까닭 없이 피곤을 자주 느끼고 감기가 갖아지는 등 호흡기 질환이 심해져서 몸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1984년 내과에서 폐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서 일반내과치료만 했습니다. 85년경부터는 기침과 통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다시 검진한 결과 폐결핵 2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이야기입니다.………… 6개월동안 약을 타서 먹었으나 차도는 없고 오랜 항생제로 위장장애까지 나타나 이중의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결핵은 낫지 않고 병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1986년 11월경 국립의료원 흉곽 내과에 입원하여 폐조직 검사를 받고서야 비로소 ‘탄분증(진폐증의 일종)’이라는 진단이 내려지게 되어서 저의 확실한 병명이 밝혀졌습니다. …… 탄광촌의 광부도 아니고, 연탄공장의 노동자도 아닌 가정주부가 이런 병에 걸릴 까닭이 무엇입니까? 담배 한 대 입에 대본 적이 없는 저의 폐가 왜 새까맣게 되어 불치의 병에 시달려야만 한단 말입니까?”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어렵게 일해 20년만에 산 내 집이었지만, 당시 상봉동 인근에는 많은 연탄공장들이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석탄더미, 형식적으로만 갖춰져 있는 분진망, 덮개도 없이 달리는 연탄 트럭 등 20년만에 산 집이라고 좋아 하기에는 너무나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어쩔수 없이 피해자가 된 사람들

당시 서울시내에는 17개의 연탄공장이 있었다. 상봉동에서 이문동으로 이어지는 몇 km 안에는 중앙선을 타고 강원도에서 올라온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 석탄은 모두 연탄이 되어 서울 시민들의 연료가 되었던 것이다. 삼표연탄을 비롯, 대성연탄, 삼천리연탄 등 국내 굴지의 연탄공장이 모두 모여있던 상봉동에서 이문동 구간은 어느 탄광촌 못지 않은 석탄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빨래를 널면 새까맣게 되고 마루를 걸래로 닦으면 먹빛 탄가루가 새까맣게 걸레에 묻어 나왔습니다. 그런 곳에서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뛰어다녔고, 상봉동에 내 집 한 칸이라도 장만한 기쁨에 어쩔 줄 몰랐던 지난날이 곧 제가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60년대 이후 급속히 늘기 시작한 서울의 도심은 처음에는 논과 밭이 있던 이곳을 주택가로 바꾸어 버렸다. 인근에 연탄공장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집 값이 쌌던 이곳으로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이사를 하게 되었고, 설사 좋지 않더라도 “죽기야 하겠냐?”는 공해에 대한 무관심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14회의 재판 끝에 얻어낸 1000만원

86년 탄분증 판정이 내려지고, 87년 삼표연탄에 대한 소송, 그리고 1년 동안 14회나 진행된 재판으로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탄광 노동자에게 진폐증은 흔한 질병이지만, 연탄공장 인근에 사는 가정주부가 진폐증에 걸린 것은 “누구라도 진폐증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특히 박길래씨 사건을 계기로 서울시에서 추가로 진행한 검진에서 의사(擬似) 진폐증이 수십명 발견되는 등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서 사회적 충격은 더욱 커지게 된다.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한 87-88년은 서울 올림픽 준비가 막바지로 접어들던 때인지라, 도심 한폭판에 사는 주민이 진폐증에 걸렸다는 사실은 국제사회적으로도 망신꺼리가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몸이 아파 일을 하지도 못하고, 어렵게 장만한 집도 약값으로 팔아버린 박길래씨는 삼표 연탄을 상대로 낸 9100만원을 피해 배상 소송에서 삼표연탄이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을 받는 것으로 사안은 사실상 종결 된다.


공해 문제, 과연 피해자는 누구인가?

이후 서울시에서는 연탄공장의 서울시 외곽 이전을 약속했으나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결국 가정용 난방연료로 연탄이 안 팔리게 되자,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모두 이전하였다. 지금은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린 상봉동-이문동에서의 연탄공장 사건은 우리에게 공해를 일으키는 자와 피해받는자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좋은 예였다.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피해가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윤추구를 위해 공장이전을 회피하는 대기업과 이를 눈감아주고 있는 행정당국의 문제는 흔히 나타나는 환경문제의 양상이며,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연탄공장 인근이라도 집을 구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생존권은 여전히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해 추방운동은 독점재벌에 대한 반대운동이었고, 지역주민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이었음을 “상봉동 박길래씨 사건”은 잘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