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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경운동사 4 - '우리 군민 다 죽이고, 그 위에다 세워라!'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대학생신문 2000년 4월 17일자

<한국환경운동사 기획연재>

1. 최초의 반공해투쟁 - 온산주민투쟁 (`84-`85)

2.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진폐증 사건

3.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투쟁(`88-`89)

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5. 대구 페놀 사건(`91)

6.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4-`95)

7. 동강 댐 건설 반대운동(`98-`99)

8. 돌이켜 보는 80-90년대 환경운동


우리 군민 다 죽이고, 그 위에다 세워라!

-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


청년환경센터(준) 대표 이헌석

마른 하늘에 날벼락 - 안면도 핵 폐기장

1990년 11월 3일 모든 신문에는 “정부는 서해안 안면도 일대에 핵폐기물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시설을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충남도와 협의중”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를 본 안면도 주민들을 깜짝 놀랐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충남도와의 협의를 거쳐 100만내지 150만평의 부지 매입까지 끝낸 것으로 보도되었기에 지역주민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지역주민들과의 협의는 커녕, 그 사실조차 처음 듣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지역 청년회는 물론이고 로타리 클럽, 라이온스 클럽 같은 친목모임들까지 이에 대해 즉각 반발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날 이후 지역주민들의 반발은 단지 불만과 불평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5일 150명의 집회와 초중고교생 등교 거부, 상가 철시 결의, 6일 4000-6000명의 집회와 1500여명 수업 거부 (안면도 초중고교생의 45%), 7일 200여명 버스터미널 광장에서 연좌 농성 및 초중고교생 3000명 집회 참가 등 연일 집회와 시위가 계속되었고, 그 연령대는 초중고등학생에서 청장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안면도 항쟁의 날, 11월 8일

이와 같이 집회와 시위가 연일 계속된 것은 11월 9일 예정된 원자력위원회에서 안면도 핵폐기장 부지 선정이 결정되기 전에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반대 집회의 절정은 11월 8일 열린 “핵폐기물처분장 설치결사반대대회”였다. 당시 집회 기록을 보면 11월 8일 집회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다.

“8일 안면읍 광장에 1만5천명 집결 2차 총궐기 대회 개최, 10:30 화염병, 휘발유드럼, 폐타이어 준비 안면교(연육교)에 방어선 구축하려다 실패. 안면읍까지 밀림. 11:40 안면지서장 승용차 방화, 공무원 6명 납치 감금. 12:50 …… 포크래인 방화 …… 19:40 서산경찰서 안면지서 방화 21:00 과기처장관 핵폐기장 건설 계획 백지화 선언 (안면도 투쟁일지 중에서)”

“시위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경까지 종일 지속되었다. 시위에서는 ‘안면공화국’등의 격렬한 구호가 적힌 옷이 등장하였고 ‘출정가’ 등의 운동권 노래가 불려졌다. 또한 시위 현장에 나와있던 공무원과 경찰관이 주민들에 의해 감금되고 폭행을 당했으며………(조선일보 90년 11월 9일)”

1만 7천명의 섬 주민 가운데 1만5천명이 모인 이날 집회가 끝나고 몇 시간 뒤 과기처 장관은 밤 9시 뉴스에 나와 “주민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 어떤 신규시설도 안면도에서 추진하지 않겠다”는 백지화 선언을 한다. 보통 “정부의 시간 끌기 전략”과 “책임 미루기 전략”으로 인해 초기의 열정과 열의가 식어버리고 결국은 패배하고 마는 대부분의 환경투쟁과 달리 단기간의 집중적 투쟁을 통해 “백지화 발표”라는 실질적 성과를 얻어 낸 것이다.

하지만 11월 8일 집회는 성과가 큰 만큼 피해도 컸다. 집회 당일 안면도 반투위 위원장이 연행된데 이어 9일 새벽에는 2500명의 전경을 투입, 섬을 봉쇄한 상태에서 중고등학생 29명을 비롯 78명이 기습적으로 연행되었다. 결국 7명이 구속되고 3명이 수배되는 등 안면도 주민들에게는 수습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평민당 중앙당사 단식 농성, 구속자 석방?수사 중지를 위한 집회 개최 등 사태 수습을 위한 안면도 주민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구속자들은 90년 12월 모두 보석으로 풀려나오게 된다.


3년의 싸움 끝에 얻어낸 승리

이렇게 일단락이 된 듯한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은 93년까지 계속된다. 과기처 장관이 TV 뉴스를 통해 발표한 “백지화”였지만 논란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로 안면도를 계속 지정해 놓은 상태에서 각종 설명회와 대덕 연구단지 견학 등의 방법으로 지역주민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쓴다. 지역주민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면서 진행했던 이와 같은 회유책으로 결국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핵폐기장 유치추진위원회”라는 조직까지도 만들어지게 되고, “유치추진위원회”의 활동은 지역주민들끼리의 갈등으로 알려져 많은 혼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92년 5월 이것이 돈이 개입된 정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비밀문서 발견을 통해서 밝혀지고 “유치추진위원회”의 지역주민 양심선언으로 인해 92년 다시 대규모적 집회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93년 3월 과기처 장관의 백지화 발언으로 안면도 투쟁은 “최종 승리”하게 된다.

이렇게 종결된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은 다른 지역 투쟁과는 다른 몇 가지 양상을 보인다. 초기부터 탄탄한 주민조직의 집행력을 바탕으로 주도면밀한 계획을 수립했으며, 투쟁의 수위를 한정하지 않은 폭 넓은 투쟁을 통해 지역주민들의 분노를 투쟁으로 직접적으로 조직하는 등 투쟁전개에 있어서도 남다른 측면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면도 투쟁의 큰 성과는 전국적으로 핵발전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 “지역주민이 반대하면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일깨워준 것이다. 다른 환경투쟁과 달리 승리한 투쟁으로 기억되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의 성과는 이후 94년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으로 그대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