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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한국환경운동사 5 - '사상 최대의 환경사고, 대구 페놀 오염'

 

<한국환경운동사 기획연재>

1. 최초의 반공해투쟁 - 온산주민투쟁 (`84-`85)

2.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 진폐증 사건

3.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투쟁(`88-`89)

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5. 대구 페놀 사건(`91)

6.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4-`95)

7. 동강 댐 건설 반대운동(`98-`99)

8. 돌이켜 보는 80-90년대 환경운동


사상 최대의 환경사고, 대구 페놀 오염

- 대구 페놀 사건(`91) -


청년환경센터(준) 대표 이헌석(LEEHS1@chollian.net)


9년전 미국의 대통령이 신에게 물었다. “재정적자를 흑자로 돌릴 수 있을까요?” 신이 대답했다. “10년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일본의 수상이 신에게 물었다. “우리는 미국에게 No 라고 말할수 있게 될 까요?” 신이 대답했다. “20년 이후에나 가능 할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신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강물들이 깨끗해 질 수 있을까요?” 침통한 표정을 지은 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신의 예언은 맞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 금수강산이라던 한국의 강물에 대한 신의 예언도 틀릴까? 낙동강에서 생명체를 해치는 독소들이 발견된지 9년이 지났다. 그러나 전국의 강물들은 마냥 공업폐기물들에 오염되어만 간다. ……… (1999년 10월 조선일보 아듀 20세기 중에서)


사상 최대의 환경사고 - 대구 페놀사건

20세기를 정리하면서 각 언론의 90년대 10대 사건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사건이 바로 “대구 페놀사건”이다. 그만큼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었던 것이다. 대구 페놀사건은 91년 3월 16일 대구 시내 수돗물에서 악취가 나면서 시작되었다. 90년대 초는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심해지고, 먹는 샘물 시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진행되던 때라 수돗물에서의 악취는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5일뒤인 21일이 검찰이 “이 사건은 두산전자가 페놀 원액 30톤을 흘려 보내 발생했으며, 페놀 원액이 수돗물 소독에 쓰이는 염소와 결합하여 클로로페놀이라는 발암물질로 바뀌었다”는 발표를 하면서 분노는 경악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두산전자는 90년 11월부터 325톤의 페놀을 몰래 방류 해왔었다는 사실 역시 함께 밝혀지면서 대구 시민을 비롯한 온 국민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2번이나 반복된 사고

21일 검찰 발표와 함께 공장장을 비롯한 6명이 구속되고,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같은 직능단체,  YMCA 등의 소비자 단체, 기타 환경단체들의 두산제품, OB 맥주 불매 운동 등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두산그룹과 정부에서는 이 사태를 조기에 진화하기 위해 두산그룹 회장이 200억 기부의사를 발표하고, “맑은 물 공급 계획”을 조기에 완성 발표하겠다고 밝히는 등 다각도로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특히 정부는 “두산 그룹의 행위는 용서 못 할 반사회적 범죄”라는 극단적인 비난까지도 서슴치 않으면서 일개 기업의 환경파괴문제를 부각시키기에 주력했다.

하지만 두산그룹과 정부의 이러한 발표는 똑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면서 모두 허구임이 들어나게 되었다. 4월 22일 일어난 2차 페놀 유출사고는 당시 환경처에서 두산전자의 조업재개를 결정한지 불과 10여일만에 일어난 것이라 더욱 많은 이들을 분노케했다. 결국 환경처 장관과 차관이 경질되고, 이 사건은 종결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실질적인 피해자 - 페놀피해임산부

한때의 유행처럼 대구 페놀사건은 이렇게 잊어지는 듯했다. 그 동안 집회와 시위에는 익숙하지 않은 수없이 많은 시민단체들과 직능단체들의 환경운동은 언론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대되었지만, 장관, 차관의 경질과 이후 계속되는 사건이 없음에 따라 언론은 관심을 끊게 되고, 따라서 운동을 주도 했던 시민단체들도 관심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수돗물을 먹은 임산부들이 유산, 기형아 출생, 정신적 피해 등을 호소해 온 것이다. 이후에 “페놀임산부피해자모임”으로 변화된 이들은 시민단체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두산그룹과 대구시를 상대로 싸움을 계속 했다.(이후 페놀임산부피해자모임의 대표는 시민단체들이 뉴스거리에만 달려들고 문제가 잊혀지면 사라지는 것을 “철새운동원들”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 등에서 정신적 피해는 인정할 수 없으므로 배상할 필요가 없으며, 유산과 기형아 출산은 인과관계 증명을 이유로 유보하는 등 난황을 거듭하다가 95년 3월 배상판결이 날 때까지 계속되는 법정싸움을 진행했다.


뚜렷한 성과없이 환경 단체만 늘어난 대구 페놀사건

91년 한차례 파동으로 홍역을 겪은 대구는 이후 94년 낙동강일대 암모니아성 질소 파동, 96-97년 대구위천공단건설을 둘러싼 물문제 파동 등 낙동강 문제로 인한 수없이 많은 파동을 거치게 된다. 당시에 조속히 마련하겠다던 “맑은 물 공급 대책”은 1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뚜렷한 성과 없이 매년 물 문제를 둘러싼 파동과 수돗물 값 인상 논쟁, 물 분담금 부과와 같은 민중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뚜렷한 성과 없이 매듭지어진 대구 페놀 사건이었지만, 시민운동과 환경운동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이전의 환경운동과 다른 국면을 제공한다. 소비자 단체들의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국에서도 본격적 의미의 시민환경운동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양적으로는 대구 페놀사건을 중심으로 91-92년을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100여개 이상의 환경단체가 생겼으며, YMCA, YWCA 등 환경문제를 다루지 않던 시민단체들에서도 환경문제를 자신의 운동주제로 삼는 일들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이는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한국사회에서도 본격적 의미의 시민운동이 태동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