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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경운동사 1 - '우리 아이들만은 살려주이소' 최초의 반공해투쟁, 온산주민투쟁





대학생신문 2000년 3월 7일자

<한국환경운동사 기획연재>

1. 최초의 반공해투쟁 - 온산주민투쟁 (`84-`85)

2. 상계동 연탄공장 진폐증 사건 (`88)

3. 계속되는 방사능 피폭과 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투쟁(`88-`89)

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0)

5. 대구 페놀 사건(`91)

6.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94-`95)

7. 동강 댐 건설 반대운동(`98-`99)

8. 돌이켜 보는 80-90년대 환경운동


우리 아이들만은 살려주이소

-최초의 반공해투쟁 온산주민투쟁-


청년환경센터(준) 대표 이헌석(LEEHS1@chollian.net)


거대한 공해지구의 탄생

경남 울주군 온산면. 이곳은 미역, 복어 등 해산물이 풍부하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1974년 건설부가 산업기지 개발지역으로 고시하면서 이 곳은 악취와 매연으로 뒤덮힌 공해도시로 변하기 시작한다. 비철금속?석유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계획된 공업단지는 78년 고려아연을 시작으로 79년 온산동제련, 80년 풍산금속, 럭키화학, 쌍용정유등 굴지의 비철금속, 석유화학공장이 입주한다. 온산주민들은 이미 60년대부터 인근 울산 공단주민들의 고충을 알고 있었기에 개발에 대한 ‘환상’은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사독재정권과 ‘국가시책에 반대할 수 없다’는 전반적인 분위기로 인해 공단건설을 반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78년 동해펄프의 흙탕물 피해, 쌍용정유의 송유관시설분쟁?준설작업 피해, 79년 고려아연의 공장폐수 피해 등 크고 작은 피해들이 계속 이어졌고, 이 로 인해 청원, 항의시위 등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는 ‘공해’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때여서 지역주민들에게는 공해와 피해보상, 환경운동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또한 환경운동단체가 없던 때라, 지역주민들의 귀동냥과 일본서적 구입을 통해 개별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특히 79년 온산동제련의 폐수 누출사고(시험가동 10일만에 시운전자의 실수로 전해액이 누출. 기준치의 1000배의 동이 배출됨)처럼 대규모적 피해가 점점 늘어나면서 각 부락들 간의 공동활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집단 괴질의 발생

온산공단으로 인한 피해는 70년대까지 각 공장별로 피해원인이 분명히 들어났으나, 80년대에 들어서면 공장이 많아지고, 오염이 축적되어 그 책임소재를 가지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피해보상 역시 개별 공장에 공장전체로 바뀌기 시작했고, 피해보상 대상도 어장피해에서 대기오염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로 점점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82-83년부터 온산지역에서 원인모를 집단괴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허리, 팔, 다리 등에서 전신으로 통증이 퍼지는 전신 신경통 증세, 심한 경우에는 수족마비, 전신마비, 반점 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집단괴질은 중금속 폐수가 흘러나오는 대정천을 중심으로 매년 늘어 그 환자 수가 700-1000명을 헤아리게 되고 85년에는 12세 소년이 괴질로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피해보상을 요구하던 지역주민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집단괴질에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온산지역주민들만 알고 있던 이 사안은 85년 1월 한국일보의 보도, 한국공해문제연구소(우리나라 최초의 환경단체)의 활동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당시 한국일보는 사회면 톱으로 “온산공단 어민 500여명 이따이이따이병 증세”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제한다.


우리아이들만은 살려주이소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진 온산지역의 비극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당시 심한 괴질을 알고 있던 한 지역주민은 현지 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당신들이 이곳에 일곱 번째 찾아온 사람입니다. 아무대책도 없이 왔다가기만 하면 뭘합니까 선생님 제발 살려주이소 …… 이젠 5분동안 같은 자세로 누울수도 없고요 …… 막내딸도 작년부터 어깨가 아픈데 금년부터는 더 심해지고 있어요. 우리들은 죽어도 별거 아닌데 어린 아이들이 문젭니다. 우리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 애들만은 제발 좀 살려주이소.”

몇 년의 역학조사를 단 1주일만에 해치우고 ‘생각보다 심한 것이 아니다.’는 발표를 했던 환경청과 취재를 위해 오고가는 많은 기자들 속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이 피해만 더욱 확대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아연과 길하나 사이에 있던 온산초등학교의 경우, 한반 학생 52명 가운데 26명이 눈병, 팔다리 통증, 피부병을 앓고 있었으며, 마을 방송을 통해 즉석에서 모은 환자의 수가 430명 가운데 50-60명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지만, 막상 정부측에서는 진찰 환자를 선착순 30명으로 한정짓거나, 증세와 상관없이 모두 같은 처방을 하는 등 무성의한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최초의 반공해투쟁으로서의 온산주민투쟁

이후 온산주민투쟁은 이진리 지역주민들이 집단이주하는 것으로 사실상 종결되게 된다. 언론중심의 피해보상?이주운동으로 확대되다 보니 피해보상?이주 계획이 발표되자, 투쟁자체가 소강국면으로 급속히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후 이주 계획을 둘러싸고 몇 차례 투쟁이 있었지만, 더 이상 뉴스꺼리가 없던 언론은 이미 등을 돌린 이후였다. 수 백명에 달하는 지역주민들의 증상이 왜 일어났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둔 인근 지역으로 이주한 지역주민들은 이후 생활터전을 잃고 예전의 평화로운 삶은 이제 상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의 공해병이 5-10년이상 다양한 역학조사와 규제를 통해 원인을 밝혀내고 그것을 제거한 것과는 많은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하지만 ‘공해’에 대한 개념도 없던 당시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진행된 지역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의 의미는 결코 삭감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인 중심의 자연보호운동, 사회계몽운동이 아닌 지역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만들어진 온산주민투쟁은 이후 만들어질 80년대 환경운동의 주요한 특징이다. 특히 환경운동단체와 지역주민조직의 연대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