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투표제도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 가운데 지역주민들이 해당 현안을 직접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은 제도이다. 그 동안 공청회, 설명회 등 정책입안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장치는 있었으나, 대부분 일방적으로 정책 추진을 보완하거나 심한 경우 지역주민들을 들러리로 만드는 ‘면죄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주민투표제도 도입은 시민사회단체의 주요 요구사항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투표제도가 법제화되는 과정에서 정부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반영되어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는 문턱이 너무 높은 반면(유권자의 20분의 1~5분의 1의 서명이 필요) 정부와 지자체는 언제라도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등 지역주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이 있어 왔다. 다시 말해 주민투표의 형식은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만 실제 내용은 정부나 지자체의 이해에 따라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인 주민투표에 ‘민주’도 ‘주민’도 없었다 주민투표에 대한 시민사회단체들의 우려는 지난 11월 2일 진행된 방폐장 주민투표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산업자원부가 해당 지자체에 요청해서 진행된 11.2 방폐장 주민투표에 처음부터 ‘주민’은 없었다. 투표운동에 들어가기 전부터 해당지역에서는 빵과 음식이 공공연하게 공급됐고 버스를 동원한 ‘견학’이라는 이름의 관광 향응도 제공되었다. 또한 공무원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핵폐기장 유치운동에 앞장섰다. 일반적인 선거라면 법률에 위배되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버젓이 진행된 것이다.
11.2 방폐장 주민투표 타락의 백미는 40퍼센트에 이르는 부재자신고율과 이를 둘러싼 부정투표였다. 주민투표가 진행된 군산, 경주, 영덕, 포항 등 4개 지역은 공무원들을 동원한 경쟁을 통해 투표 사상 유례가 없는 40퍼센트의 부재자신고율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부재자신고서를 대신 작성한 ‘대필신고서’가 무더기로 발견되는가 하면, 사회복지 수급자들을 대상으로 부재자신고를 강요하는 등 부재자 신고 ‘실적 채우기’가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전체 25만 명의 부재자신고서 중 0.6퍼센트에 불과한 1500여 명을 대상으로 찾아낸 부정 건수만도 800여 장이나 되었고, 4개 지역대책위 중 한 곳인 영덕대책위가 지역조사를 통해 밝혀낸 것만 41.4퍼센트에 달했다. 또한 부재자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장이 대신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거나 지역주민이 기표한 투표용지에 다시 기표를 하여 무효표를 만드는 것 같은 기막힌 일까지 벌어졌다. 이를 두고 민주주의라 부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한편 지역간 경쟁이 심했던 주민투표 운동기간에는 망국적인 지역감정까지 설쳐 주민투표의 의미는 더욱 흐려졌다. ‘경상도 문딩이들에게 이제는 질 수 없다.’는 현수막이 군산에 나붙는가 하면, 똑같은 현수막을 만들어 ‘이것은 ‘군산’에 걸린 현수막입니다.’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여 경주에서 활용하는 등 핵폐기장 유치를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쟁’으로 몰고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밖에 주민투표운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공무원들이 유치를 위해 삭발을 하고 유인물 배포에 나서는 등, 자유당 시절 3.15 부정선거 때나 봤음직한 일들이 21세기인 지금 핵폐기장 유치신청 지역에서 재현됐다.
최소한의 균형감각도 잃어버린 언론 한편 이번 핵폐기장 주민투표에 있어 불공정한 언론의 태도도 사태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재정구조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언론일수록 더욱 심각하게 보인 불공정 보도는 단지 핵폐기장을 둘러싼 쟁점을 알리는 정도를 벗어나 사실상 유치를 위한 홍보를 위한 내용 일색이었다. 특히 주민투표를 중심으로 지역언론의 보도를 보면, 일본, 프랑스 등 외국 핵폐기장의 깨끗한 모습만 일방적으로 알린다던가, 정부의 입장을 단순히 전달하는 정도를 벗어나 핵폐기장의 경제효과 강조, 투표 찬성률 제고, 공무원 개입 용인 등 유치찬성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포항에서는 지역에서 유치찬성 측 입장을 대변하는 경북일보 앞에서 반대대책위가 천막농성을 벌이기도 했고, 군산의 경우 <전북민언련>이 핵폐기장을 둘러싼 지역언론의 보도경향을 모니터링해서 ‘편향성과 함께 사실왜곡과 부정적 의제설정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전북민언련>의 지역언론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핵폐기장 주민투표를 앞둔 9월 5일부터 10월 12일까지 한 달 동안 전북지역 4대 일간지에서 총 211건의 핵폐기장 관련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 중 62퍼센트인 130건이 명백한 찬성입장이었고 명백한 반대입장 기사는 10퍼센트인 21건, 중립적인 기사는 28퍼센트인 60건으로 분석됐다. 지역별로 심각한 부정행위가 핵심적인 문제였던 방폐장 주민투표에서 이러한 분석결과가 입증하는 것은 지역언론이 비판적 분석과 대안 제시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균형감각까지도 저버렸다는 사실이다.
중요하지만 빠진 문제, 안전성 사실 핵폐기장 문제에 있어 최우선 요소는 안전성이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핵폐기장은 중저준위핵폐기물을 처분하는 곳으로,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장갑, 필터, 작업복 이외에도 핵발전소 건축폐기물, 각종 동위원소 등 높은 방사능을 갖고 있는 물질들이 포함된다. 방사능 준위가 높기 때문에 중준위핵폐기장의 건설은 세계적으로도 예를 찾기 힘들다. 또한 미국 등 핵발전을 먼저 시작한 일부 국가에서도 저준위핵폐기장을 지었다가 플루토늄 등이 유출되어 폐기장을 폐쇄하는 일들이 있었다. 핵폐기물은 다른 폐기물과 달리 자연계로부터 격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처분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 격리기간이 최소 300~400년 이상이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핵폐기장 선정과정에서 정부가 지질의 안정성과 부지적합성을 조사하기 위해 할애한 시간은 2~3개월에 불과했다. 지난 6월에 핵폐기장 선정 일정발표에서 11월 2일 주민투표까지 걸린 시간을 모두 합해 채 6개월이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된 경주의 경우, ‘역사상 진도 7 이상의 지진 17회, 1978년 이후 11회 지진 기록’이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 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내용만 간략히 서술되는 선에서 조사를 마쳤다. 이후 시민단체와 국회 등이 상세한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결국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된 지금도 어떤 방식으로 공사를 할지에 대해선 결정된 바 없이 2008년까지 공사를 마치겠다는 날짜만 정해놓고 있다. 이러니 정부가 핵폐기물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도대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의구심이 든다.
유신헌법 찬성 92퍼센트, 그러나 역사는 찬성률을 지지하지 않는다 주민투표가 끝나고 경주가 89.5퍼센트의 찬성으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자 정부는 19년 묵은 숙제가 해결됐다며 축포를 터뜨리기에 바빴다. 또한 주민투표가 실시되기 불과 며칠 전까지 부정선거 시비, 관권선거 시비를 보도하던 언론들도 높은 찬성률로 핵폐기장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이야기를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이 써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국민투표로 국민들의 민의가 어떻게 조작되어 왔는지 기억하고 있다. 1972년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91.9퍼센트 투표율에 92.2퍼센트의 찬성률로 통과되었고, 1975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74.4퍼센트 찬성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주민투표 결과가 제대로 된 민의를 수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관권과 금권에 의해 왜곡된 투표가 어떠한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주는 예로 활용될 뿐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핵폐기장 건설을 무리하게 강행하려는 정부의 판단착오에 의해 우리의 아픈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2003년 부안항쟁 이후 핵폐기장 문제를 단지 지역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체계의 문제나 진행형식 정도로 생각했던 정부는 그 동안 미비했다고 생각한 지역지원을 법률로 보장하고 지자체간의 경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법을 추진해왔다. 언제나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해 온 참여정부이므로 그들이 생각하기에 주민투표를 통한 핵폐기장 건설 추진은 옳은 판단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관권·금권선거라는 ‘잠자는 용’을 깨우게 될 것이라는 시민사회의 우려와 비판을 제대로 듣는 데 소홀했고 결국 그 우려는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만약 찬성률 89.5퍼센트라는 수치에만 만족하고 핵폐기장 문제를 그대로 진행한다면 우리 사회는 퇴행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핵폐기장의 특성상 안전성과 지역적합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지적이나 핵폐기장 문제의 본질인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번 11.2 방폐장 주민투표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높은 찬성률로 핵폐기장 문제를 해결했다는 자화자찬 속에 이대로 끝난다면, ‘결과중시 과정경시’라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30년이나 후퇴시키고 안전성에 대한 검토도 미흡한 채로 성공의 축배를 들며 서로의 공적을 치켜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의 모습은 주민투표의 성패를 떠나 한 편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헌석 ecenter@eco-center.org
<청년환경센터> 대표, <반핵국민행동> 사무국장
| | 함께사는 길, 2005년 12월호 http://hamgil.kfem.or.kr/bbs/zboard.php?id=20051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