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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 투표와 제비뽑기

가라타니 고진 - 투표와 제비뽑기

참여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시민이 전원 참여하는 민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비해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은 매개적(간접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구별이 오해의 근원이다. 첫째, 전원이 민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회에서 의논을 하는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발언자는 자기 마음대로 말할 뿐이고 그 말에 대해 응답할 시간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민회는 하나의 의식이나 다름없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을 특징짓는 것은 의회보다도 국가의 관리직을 전원이 참여한 제비뽑기로 뽑은 것이었고, 더구나 그것을 엄격하게 심사하고 탄핵하는 사법체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탄핵 재판소는 민회의 결정마저 물리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배심원도 추첨으로 선출되었다(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희망하는 시민은 누구라도 종신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배심원에 의한 투표는 무기명 비밀투표였다. 아테네의 언론 자유는 이러한 시스템에 의해 지켜졌던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은 단순히 전원이 모여 직접 의논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원이 제비뽑기에 의해 행정이나 사법에 참가하는 데 있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참여민주주의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참여는 의회에―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참여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투표와 제비뽑기

그렇다면 아테네 사람들은 왜 이러한 시스템을 취하려고 했던 것일까? 자신들 앞에 참주(僭主)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주는 지금도 영어로 ‘폭군(tyrant)’이라고 불리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한 귀족이 평민의 지지를 얻어내 다른 귀족을 넘어뜨리고 귀족정을 폐기했는데 그것이 참주다. 아테네에서는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B.C.527)가 중소농민을 보호하고 선정(善政)을 강권했다고 하는데, 아들인 히피아스는 말 그대로 폭군이 되었다. 기원전 510년 히피아스가 추방되고 민주정이 확립되었다. 참주는 일반적으로 아테네 이외의 도시국가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참주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두번 다시 참주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주도면밀하게 고안한 곳은 아테네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참주는 어떤 의미에서 근대의 절대주의적 군주와 유사하다. 절대주의적 군주는 상인 부르주아지와 결탁하면서 다른 봉건 군주를 타도하고 봉건적 제도들을 폐지한 뒤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주의 왕권을 무너뜨린 것이 부르주아 혁명이다. 사실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왕이 처형되었다. 부르주아 국가도 또한 절대주의적 권력이 두번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 시스템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르주아 국가의 시스템은 제비뽑기를 기본으로 한 아테네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개개인은 주권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홉스에 대해 말한 것처럼 ‘밀실’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선거 때 사람들은 주권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선거 다음날부터 대표자나 국가를 따른다. 아테네 시민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도저히 민주정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정은 민회에 모여 의견을 말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행정과 사법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발에 어떤 강제나 교사(敎唆), 매수도 통할 수 없는 뭔가를 개재시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연성이다.

제비뽑기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에 의해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무기명 투표에 의해서는 매수를 없앨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증대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추첨에 의해 뽑는다면 매수라든가 압력 같은 수단의 효과가 사라진다. 물론 전체를 매수해버리면 추첨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용의주도하게도 그런 위험에 대비해서 매수를 무효로 하는 복잡한 제비뽑기 방식을 고안했다.

몽테스키외가《법의 정신》에서 주목한 것처럼 영국에서는 삼권분립이 성립해 있었다. 물론 삼권분립은 서로 권력을 제한하려고 해온 역사적인 계급투쟁의 결과로 형성된 일종의 균형이고, 따라서 설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삼권분립이라는 생각만으로 삼권분립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입법 권력, 행정 권력, 사법 권력은 분리되어 있어도 결국 하나의 권력으로 수렴되고 만다. 소련 연방의 헌법에 삼권분립이 실린 것은 그로테스크한 우스개라고 생각하는데, 예컨대 일본에서 최고재판소가 어떻게 선출되는지, 관청의 사무차관이 어떻게 선출되는지를 보면 된다. 일본에 삼권분립이 있다고 하는 것도 거의 우스개나 다름없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권분립이 철저하게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행정이나 사법에서 실시된 제비뽑기였다.

두개의 중우정치

거듭 말하자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참주제를 타도하는 데서 생겨났고, 나아가 참주제가 두번 다시 출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주도면밀한 고안에 의해 성립했다. 국가의 관리직을 제비뽑기로 선출하고, 나아가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로 선출된 배심원이 있는 탄핵 재판소를 통해 철저하게 감시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개혁을 완수한 페리클레스 자신이 나중에 탄핵 재판에 걸려 실각했다. 요컨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기 위해 취해진 시스템의 핵심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였다. 그것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에 의해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테네 사회를 오로지 찬미하기만 하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애초에 아테네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은 노예의 노동에 의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아테네의 민주정은 그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모순되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도움이 되었다. 민주정이기 때문에 시민은 병사로서 참주의 강요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가 싸웠다. 그런 덕분에 아테네는 군사 강국이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는 여러 외국을 무너뜨리고 노예를 획득했을 뿐 아니라 아테네 이외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델로스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종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체제가 오래 지속될 리는 없었다. 우리가 아테네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민주정을 위한 ‘정치적 기술’이지 그것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한나 아렌트처럼 아테네를 이상화하여 말하는 사상가를 상당히 수상쩍게 생각한다. 아렌트는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다양한 교훈을 끌어낸다. 예컨대 거기에서는 노동(labor)이나 일(work)과는 다른 정치적 행위(action)가 중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민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예나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테네의 민주정은 노예제나 제국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 아렌트는 이스라엘 국가를 옹호하고 미합중국을 옹호한다. 그러나 한 나라가 민주정이라는 것과 그 나라가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적이라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 국가에서 ‘시민’은 자유롭게 정치적 활동(action)에 참가하고 있지만, 그런 사실들이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적이며 대내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비정치적인 신분에 묶어둔 채 주로 육체노동(labor)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양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대중이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은 러일전쟁 후의 히비야 폭동 사건 (1905년 러일전쟁 종료를 위한 포츠머스 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 히비야 공원에 모여 일으킨 대규모 폭동사건을 말한다. 청일전쟁과 달리 러일전쟁은 막대한 전쟁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담과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한 일본측이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을 기대할 수 없다는 불만 등이 터져나왔고, 급기야 파출소를 불태우는 등 도시 폭동으로 발전했다―옮긴이)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발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대중적 폭동은 사실 러일전쟁 후 영토를 더욱 확장하라는 제국주의적 요구였다.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한일합병 뒤에 성립했다. 조선인을 독립시키는 대신에 선거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따라서 나는 아테네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아테네가 발명한 정치적 기술은 우리에게도 귀중하다고 생각한다. 아테네의 민주정을 보면 그 근저에,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성’이 변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강고한 확신이 보인다. 예를 들어 하시바 유즈루(橋場弦, 196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관리나 정치가 등 공직자의 행동에 대해서는 극히 중층적이며 빈틈없는 감시장치가 설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테네 시민이 이른바 ‘공무원의 윤리’ 같은 것에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으로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A. H. M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의 유혹에 저항하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을 아테네인들은 전혀 신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공직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주체가 뭔가 초월적인 ‘관청’이 아니라 시민단 전체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장치들의 그물망이, 여기서 말하는 공직자 탄핵 제도다.

요컨대 아테네 민주정은 영속적으로 지배자 자리에 앉는 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고 우연히 권력을 위임받은 인물도 행정에서는 책임을 엄중하게 추궁당해야 했다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원리에 의해 성립되었다.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대신에 일단 공직자가 된 이상 누구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橋場弦,《丘のうえの民主政》東京大出版會, 1997.)

아테네인들이, 인간성을 바꾸자든가 도덕성을 높이자고 하는 대신에 결함이 있어도 파국을 맞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 것은 이런 원리 때문이었다. 그것이 제비뽑기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절대주의적 군주를 타도하고 성립한 근대국가의 민주정에서, 아테네의 민주정이 열렬히 참조되었는데도 제비뽑기만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기껏해야 몇개 나라가 배심원 제도를 채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제비뽑기를 부정하는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아테네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들로부터 왔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플라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탄핵되어 사형을 당했다는 실제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중(데모스)이 주도하는 탄핵 재판의 어리석음에 반대했고, 국가의 관리직을 제비뽑기로 뽑는 시스템을 명확하게 비판했었다. 그 결과 자기자신이 탄핵 재판에 회부돼 처형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집트를 이상화하고 있었고 진리 혹은 정의는 대중적 토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학자=왕의 통치에 의해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플라톤 같은 사상가는 바로 아테네 같은 참여민주주의 사회에서만 출현할 수 있었다. 사실 플라톤은 철학자=왕의 지배를 외국(시라쿠사 :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안의 시라쿠사는 기원전 6-7세기 그리스 도시국가의 식민도시였다―옮긴이))에서 실행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노예가 될 뻔하여 허둥지둥 아테네로 도망쳐왔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테네의 민주정이 칭송되는 한편, 근본적으로 민주정을 부정하는 사고가 바로 아테네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생각은 민주정이 불가피하게 중우정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진리나 정의는 민의와 관계없다. 데모크라시(데모스의 지배)가 ‘민의’의 지배라면, 그것은 참혹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진리나 정의를 내세운다면 철학자=왕에 의한 전제(專制)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민주적이면 중우(衆愚)적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민주적인 것을 부정한다면 귀족적이거나 독재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아테네의 민주정이 초래하는 중우정치와 근대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초래하는 중우정치를 엄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즉 중우정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제비뽑기에 기초하는 민주정에서 가하는 비판과 대의제에 기초하는 민주정에서 가하는 비판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 포퍼는 맑스주의의 전위당 개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의 철학자=왕이라는 관념에 닿는다고 지적했다(《열린사회와 그 적들》). 그러나 포퍼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원천을 플라톤에서 찾아낸 것은 근본적인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포퍼는 근대의 의회제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만, 민주주의를 파괴해버리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는 사실 그것 자체의 결함에서 나온 중우정치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의회제 민주주의를 강조함으로써 파시즘을 본질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편 플라톤이 부정한 것은 제비뽑기에 기초하는 민주정에서 생겨난 중우정치다.

거듭 말하자면 민주정이 중우정치가 되기 쉽다고 할 때, 아테네의 민주정과 근대의 민주정을 구별해야 한다. 아테네 민주정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제비뽑기에 있었다. 근대의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그 점이 무시되었다. 거기에서는 무기명 비밀투표가 민주정을 보증하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각자는 선거 때만 주권자가 되어 대표를 뽑는다. 그러나 실제 대표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거나, 돈을 모으는 힘이 있거나, 아니면 인기가 있거나 유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중(데모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그저 대표자에게 한표를 던질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우정치가 생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대표자, 걸출한 지도자를 찾고자 할 때다.

그러나 아테네의 중우정치는 반대로 걸출한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페리클레스가 실각한 것이 그런 예다. 오늘날 제비뽑기가 이용되는 것은 배심원이나, 그밖에 사람들이 하기 싫어한다거나 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당번과 같은 일에 대해서뿐이다. 그런데도 아테네에서는 행정관을 뽑는 방법으로 제비뽑기가 채택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테네의 ‘시민’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고 여가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을 지닌 인간이 권력을 가지는 상황을 탄핵 재판으로 억제하려고 한 것이다.

더군다나 군인은 아테네에서도 제비로 뽑지 않았다. 무능한 사람이 지휘를 한다면 전쟁에 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대중은 장군을 가장 경계했다. 그래서 한 전쟁에서 열명 이상의 장군을 임명하고 매일 사령관을 교체하여 한사람에게 공적이 집중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공을 쌓은 사람은 민회에서 압도적으로 인기를 얻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중에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등도 군사 분야에서 쌓은 공적과 명성 덕택에 ‘황제’에 올랐다. 그렇게 경계하는데도 장군이 권력을 쥐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민회에서는 그런 상황을 억제할 수 없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심사했던 곳이 탄핵 재판소였다. 예를 들어 탄핵 재판에서는 불운하게도 전쟁에 패하거나 어쩔 수 없이 많은 부하들을 죽게 한 장군이 일반 시민의 손에 심판받았던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번트에 실패한 선수를, 고등학생도 할 수 있는 걸 프로인 주제에 그것도 못하느냐고 비난하는 팬이 있는데, 그런 정도의 판단력으로 시민들은 장군을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분노했던 것은 그러한 경우였다.

근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이런 일은 없다. 대중이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행정이나 사법 관료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비뽑기에 의한 배심원제가 있는 데서도 최종심급에서는 전문 재판관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민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는 단지 ‘밀실’에서 주권자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국가기구나 자본이 만든 권력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비뽑기를 도입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를 분노케 한 중우정치가 출현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특별히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기명 투표인가 아니면 제비뽑기인가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우선 복수의 후보를 무기명 선거에서 뽑고 마지막에 제비뽑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선거와 제비뽑기

예컨대 기쿠치 칸(菊池寬, 1888-1948)의 단편소설《투표》에서는 처음에 제비뽑기가 제안되는데,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선발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기각되고 만다. 그러나 처음에 투표를 하고 그 다음에 제비뽑기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경우는 사람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예는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츄지가 부하 한사람만을 데리고 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한 경우, 그 한사람을 무기명 투표로 뽑는다면 부하들 중에 다툼이 일어나 파벌 같은 것에 의해 분열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세사람을 적어넣는 투표로 세명을 뽑고 나서 제비뽑기를 한다면 어떨까? 이 방법이 최선인지 어떤지는 말할 수 없지만 먼저 상대적으로 우수한 부하가 뽑힐 것이다. 뽑힌 사람들 중에서 추첨을 하면 떨어진 쪽도 그다지 우열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뒤탈이 없을 것이다. 세명을 적어넣기 때문에 설령 구로스케가 자신의 이름을 쓴다고 해도 아무도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애초에 통과될 전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마음도 들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소재는 다이쇼 문단의 중심 작가를 모은《현대소설선집》을 편찬할 때 난항을 겪다가 마지막에 무기명 투표로 결정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기명 투표를 제안한 사람은 기쿠치 칸 자신이었다. 그때 기쿠치 칸은 “인기가 떨어진 작가의 심경”을 생각하고 나서《투표》라는 테마 소설을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실제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일정한 수를 선거로 뽑고 그 다음에 추첨으로 뽑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엄밀한 평가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초에《현대소설선집》을 편집하는 일은 그 정도 방식으로도 충분하다. 문단 파벌이나 인간관계 등에 의해 평가가 부당하게 왜곡된다면, 무기명 투표로 뽑고 마지막에 추첨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제비에서 떨어진 사람으로부터도 불평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에는 어차피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요즘 사람이 자신들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스꽝스럽다. 기껏해야 제비뽑기로 정해둘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다면 의외로 공평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철학자=왕 같은 비평가가 엄정한 평가를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실제로 기쿠치 칸은 일반적으로 제비뽑기를 물리쳐버린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내신서 제도(內申書制度 : 우리나라의 내신제도와 유사한 것이다―옮긴이)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또한 올해도 내신서 제도로 전 국민이 2-3개월 동안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 같은 사람은, 중등학교에 들어갈 아이는 없지만 신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싫었다. 더구나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이 기간에 생활력에 영향을 줄 정도로 걱정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작년에도 주장한 것인데, 입학자격자 중 신체검사를 거치고 출신학교의 추천이 있는 자에 한해 추첨을 하면 어떨까? 추첨에서 떨어진 사람은 다음 해에 우선적으로 넣으면 된다. 제비뽑기라면 누구나 기분 좋게 단념할 것이다. 구답시문(口答試問) 같은 뜬구름 잡는 식의 일에서 떨어진다면 누구라도 깨끗이 단념하지 못할 것이다. 좀 약삭빠르고 되바라진 아이가 유리한 것은 정한 이치다. 게다가 열서너살 때 우수했던 소년 소녀가 긴 인생에서 반드시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話の屑籠〉,《文藝春秋》, 1941년 4월호)

기쿠치 칸이 추첨을 주장한 것은 ‘내신서(內申書)’ (성적표와 달리 점수로 만들어 입시자료로 이용하는 ‘학력검사와 조사서’를 내신서라고 한다―옮긴이) 에 따른 결정에서 이러저러한 청탁이나 운동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에 내신서 제도는 수험경쟁을 완화하고 시험공부에 치우치는 풍토를 막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내신서 제도는 경쟁을 완화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은밀한 지배를 오히려 강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시험경쟁 쪽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있는 시험제도에서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필사적으로 공부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논다는 학생, 혹은 자신이 직접 과제를 찾아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학생밖에 양산하지 않는다. 무의미한 수험공부를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래서 기쿠치 칸은 추첨제도를 주장했던 것인데, 그저 우연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다. 추천에 의해 일정한 수준 이상의 사람을 모으고 그 중에서 추첨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시기의 소년 소녀의 학력을 시험 같은 것으로 가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으며, 일정한 추천을 바탕으로 추첨을 통해 대충 정하는 편이 낫다는 게 기쿠치 칸의 생각이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중학 단계에서 추첨으로 한다고 해도 수험경쟁을 없애거나 완화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국립초등학교 입시에서 시험을 본 후 제비뽑기로 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예가 있었다. 이 방식은 그다지 나쁘지 않지만, 만약 수험경쟁의 완화를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다. 수험경쟁은 피라미드의 정점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에서 추첨을 하면 다른 길로 빠질 게 뻔하다. 예컨대 예전에 도쿄의 도립고등학교 시험에서 추첨을 채택했을 때 학생들은 사립고등학교로 빠졌고, 이른바 명문 도립고등학교는 단숨에 몰락했다. 그러나 도쿄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와 그 정점을 지향하는 수험경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똑같은 것을 대학입시 차원에서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도쿄대학, 교토대학 등으로 그룹을 만들고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배분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 이전 단계의 경쟁이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변하기는 할 것이다. 마지막 단계가 제비뽑기라면 어느 대학에 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학입시의 단계에서만 추첨을 도입한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최상위 자리에서 추첨이 실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상위에서 한다면 하위 단계에서는 특별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전체가 변해간다. 조직 일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최상위의 자리, 혹은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에서도 추첨을 도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료나 기업의 최고간부를 뽑는 단계에서 추첨을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세명을 기입하는 투표로 세명을 뽑고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추첨한다. 그러면 우수한 인간을 뽑을 수 없다고 반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진 이유가, 그 사람이 특별히 유능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기쿠치 칸이《형(形)》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쓴 것처럼 주위에서 강하다고 생각하면 실제로도 강해진다. 음악이나 수학 등에서는 아무리 봐도 천부적 재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예가 있지만, 그밖의 경우에서 개인간의 능력 차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운명, 끈기, 우직함에 의해 정해진다. 그런데 우연히 운좋게 어떤 구조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인데도 당사자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현한 것인 양 믿어버린다.

오히려 추첨제는 유능함이 ‘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시킨다. ‘선거+추첨’의 경우, 무능한 사람이 뽑힐 염려는 없다. 물론 발군의 사람이 뽑히지 않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다. 그것보다 무능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마치 유능한 것처럼 행동하는 시스템 쪽이 견디기 힘들고, 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게다가 능력은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한다. 음악이나 수학의 천재여도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능한 경우가 많다. 다른 예를 들자면 일본과 달리 미국의 대학에서는, 학장은 학무적 업적보다는 경영관리 능력이 있는 비교적 젊은 사람이 뽑힌다고 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존경받지는 않지만 경멸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단지 적격이냐 아니냐가 문제인 것이다.

나는 모든 인간이 모든 영역에 평등하게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능력의 차가 있고 전문과 비전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또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고정적인 권력이 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행정관료를 제비뽑기로 뽑지만 지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국가나 기업은 아테네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켈젠은 1920년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법기관이 전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료제, 즉 본직의 전문관료가 의회에 대해 우위에 서서 민주제를 형해화하고 있다. 의회는 중앙의 최고 관청에서 기초된 법안을 다소 수정해 의결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수정이 개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심스럽다. 이 관료 지배에 바로 민주제의 최대 위험이 있다. 그리고 모든 관료제는 필연적으로 전제 지배로 향한다.”(〈관료제〉)

관료제라고 해도 국가기구의 관료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나온 거대 자본은 경영에서 관료제를 채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관료제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관료제는 있어서는 안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미 말한 것처럼 해결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관료제에서 권력이 집중되는 몇몇 결절점에 ‘선거+추첨’을 도입하는 것이다. 바로 그 방법이 폭력적 강제나 도덕적 강요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관료제를 ‘지양’하는―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은 폐기하는―것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선거+추첨제를 여러분 자신이 있는 조직―회사나 관청 그리고 조합이나 정당이라도―에서 실행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 제비뽑기의 도입은 권력투쟁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뽑고 싶은 사람을’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마지막에 제비뽑기로 결정한다면 사전 운동도 표밭 다지기도 그리고 파벌 만들기도 무의미하게 되며, 결국 ‘뽑고 싶은 사람’이 뽑히게 된다. 제비뽑기에서는 우수한 인간을 뽑을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선거+추첨’이라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대표자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권력이 집중되는 장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은 단지 독재나 관료적 고정화를 억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을 일차원적인 능력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사람을 뽑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고위 간부가 제비뽑기로 정해질 때, 아무도 최고위 간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방식이 자본제 기업 등에서 용이하게 실행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주(株主)의 다수결 지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면, 또는 사회주의가 되면, 그때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부터 실행할 수 없는 것은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사실 지금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정당이나 노동조합에서 스스로 이러한 제비뽑기를 도입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도, 제비뽑기를 채택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도 애당초 그 조직부터 민주적이지 않은 정치조직이 장래에 무엇을 실현할까? 답은 지금도 알고 있다.

현재의 기업에서도 추첨제를 실현한다면, 관료화된 노동조합에 의한 ‘노동자 자주관리’ 같은 것보다도 더욱 노동자의 자주관리와 가깝게 될 것이다. 또한 생산협동조합의 경우, 겉으로는 모두 평등해야 할 테지만 아무래도 경영과 노동의 분리를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거기에서 관료적 고정화가 발생한다. 그런 위험을 막는 데는 ‘선거+추첨’이라는 방법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가능성

절대주의 왕권을 무너뜨린 부르주아 혁명에서는 항상 아테네의 민주정이 참조되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부르주아 국가가 아테네에서 도입한 것은 무기명 비밀투표뿐이었다. 그리고 형식만의 삼권분립이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개개인은 단지 밀실에서만 주권자일 뿐이고 현실 생활에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강요하는 지배-피지배라는 관계에 방치되어 있다. 예컨대 여러분은 회사 등에서 상사를 비판할 수 있는가. 자신들이 직접 사장을 뽑을 수 있는가. 선거 때는 주권자일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임금노예(회사의 가축) 같은 것은 아닌가. 만약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면 단지 ‘밀실’만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 각자가 주권자여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에서 주창된 ‘자유, 평등, 우애’를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즉 부르주아가 더이상 하지 않으려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에게는 의회제 민주주의만으로 좋았다. 그 이상의 변혁은 곤란했다. 의회제 민주주의란 현실에서 계급이나 권력관계 속에 있는 개인을 각자 ‘밀실’ 안에 두고 그 계급관계나 지배관계를 소거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표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예컨대 자본제 기업 안에 ‘민주주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경영자가 사원의 비밀선거에 의해 뽑히는 일은 없다. 또한 국가 관료가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는 경우도 없다. 사람들에게 보장되는 자유는 단지 정치적 선거에서 ‘대표하는 자’를 뽑는 것뿐이다. 그리고 보통선거란 국가기구(군, 관료)가 이미 결정한 일에 ‘공공적 합의’를 부여하기 위한 치밀한 의식에 불과하다. 맑스는 이러한 의회제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독재라고 불렀다. 물론 부르주아 독재는 절대주의적 전제와 다르다. ‘부르주아 독재’란 부르주아 계급이 의회를 통해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다. 의회제 민주주의밖에 인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부르주아 독재인 것이다.

이와 달리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했다. ‘부르주아 독재’가 부르주아 계급이 직접 지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것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직접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직접 지배하게 된다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지를 ‘대표’하는 공산당의 지배가 되어버린다. 사실 소련에서는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독재가 절대주의적 전제정치에 대한 부정이라면, 부르주아 독재를 극복해야 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전제정치로 되돌아오는 것일 리는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특별히 오해받기 쉬운 이런 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닌 참여민주주의여야 할 터이다. 그렇다면 참여민주주의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사실 맑스는 그러한 사항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맑스가 코뮤니즘에 대해서 구체적인 전망을 찾아낸 것은 실제의 사건, 즉 1871년의 파리코뮌에서였다. 파리코뮌을 실현한 것은 프루동파의 사람들이었다. 프루동은 정치적 국가가 폐기되는 사회 형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나키(Anarchy)’다. 파리코뮌은 프루동파의 이념을 실현한 것이다. 후세에 맑스는 아나키스트에 적대적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파리코뮌의 사회 형태를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뮌은 시내 각 구에서 실시된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책임이 있으면 단기에 소환될 수 있는 시회(市會)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그 의원의 다수는 세력자, 노동자, 아니면 노동자계급의 공인 대표자였다. 코뮌은 대의체(代議體)가 아니라 집행권인 동시에 입법권을 겸한 행동체(行動體)였다. 경찰은 여전히 중앙정부의 대리자인 대신에 곧바로 그 정치적 속성을 박탈당했으며, 그리고 책임을 지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는 코뮌의 대리자가 되었다. 행정부의 다른 모든 부문에 속하는 관리도 그러했다. 코뮌의 의원 이하 공무(公務)는 노동자의 임금에서 집행되어야 했다. 국가 고위 관료들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고위 관료들 자체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공직이 중앙정부 앞잡이들의 사유재산이기를 그친 것이다. 다만 시정(市政)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국가에 의해 행사되어온 모든 발의권이 코뮌의 수중에 놓였다.(《프랑스 내전》)

파리코뮌은 입법기관인 동시에 행정기관이었다. 그것은 단지 시민이 선거에서 대표를 뽑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행정에 참여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시스템은 부르주아 민주정과는 명료하게 이질적이라고 해도 아테네의 민주정과는 상당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 파리코뮌에서는 추첨제가 채택되지 않았던 것이다. 맑스도 그렇지만 프루동도 그리스 민주정에 대해 빈번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비뽑기를 싫어했다. 다시 말해 권력에는 그렇게나 민감했던 프루동이, 아테네 사람들과 달리 ‘권력의 유혹에 저항하는 인간의 능력’을 너무 믿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코뮌에서는 모든 사법관과 행정관을 선거로 뽑음과 동시에 언제라도 소환 (예컨대 국가나 지방자치체 등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공직자를, 유권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 일정한 절차를 밟아 파면 혹은 해직하는 일을 말한다―옮긴이)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도만으로 관료제화, 즉 권력의 고정화를 막을 수 있을까? 삼권분립이 가능할까? 물론 파리코뮌은 2개월 만에 외부의 독일군에 의해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코뮌이 지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관료적인 고정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러시아혁명 초기에도 코뮌(소비에트)이 있었는데, 파리코뮌에서 배워 소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뽑은 대표가 점차 고정화되고 1년도 안되어 공산당원(볼셰비키)으로 굳어졌다. 즉 대표를 소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경우, 설령 무기명 투표가 채택된다고 해도 무리한 일일 것이다. 사실상 ‘비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추첨’이라는 시스템을 갖지 않는 한, 소환도 삼권분립도 기능하지 않게 된다.

파리코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사실 불과 두달이 지나지 않아 중앙집권적인 그룹이 다수파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달 만에 없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이상 파고들 수 없었다. 그러나 물어야 할 것은 중앙집권적인가 반(反)중앙집권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인가 아나키즘인가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중앙집권주의를 막을 수 있을까, 관료적인 지배를 막을 수 있을까 물어보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이다. 도덕적인 설교에 의해 관료제를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국의 긴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또 근래의 중국 역사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문화혁명 같은 잔혹한 ‘수술’에 의해서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의학적인 은유를 사용한다면 나는 노구치 하루치카(野口晴哉, 1911- )의 ‘정체(整體 : 손 등의 힘으로 뒤틀린 골격을 교정하고 몸의 균형을 되찾음으로써 건강 증진과 체질 개선을 꾀하는 일을 말한다―옮긴이)' 처럼 어딘가 몸의 다른 곳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저절로 전체를 치유케 하는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들 알다시피 러시아의 코뮌=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당 독재, 그리고 스탈린 독재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독재의 붕괴, 나아가 소연방의 붕괴는 부르주아적 대의제 민주주의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형태이지만 곤란한 것은 그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처칠은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냉소적인 태도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걸출한 대표자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리는 심리도 널리 퍼져 있다. 민주주의를 대의제 민주주의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나는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성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기쿠치 칸이 생각한 것처럼 ‘인간성’은 시스템을 약간만 바꾸어도 상당히 변한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까지는 없으며, 또 비관적인 전망을 득의양양하게 말할 것도 못된다. 내가 여기서 말한 것은 새로울 것도 심원할 것도 없는 사항이다. 언제 어디서나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사상가들은 이러한 기술을 바보 취급하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송태욱 옮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일본의 문학비평가. 긴키(近畿)대학과 뉴욕의 콜럼비아대학 교수.《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유로서의 건축》《윤리21》등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지역통화를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한 새로운 윤리-경제운동인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을 제창하여 이끌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가라타니 교수와의 대담이《녹색평론》제65호(2002년 7-8월호)에 실린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일본정신의 기원―언어, 국가, 대의제, 그리고 통화》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출간(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3)된 그의 저서《日本精神分析》의 제3장 중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투표와 제비뽑기', 녹색평론 2004년 9~10월 제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