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과 인류학적 접근의 만남
0. 도입 - 기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의 한계
이 글은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social constructivist approach to technology)'이라고 흔히 통칭되는 다양한 사회학적 방법론들을 개관하고 이에 대해 제기된 비판들을 검토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필자가 이러한 주제를 선택하게 된 문제의식을 밝혀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는 필자가 파악한 바의 '기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 몇 가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조금 상술해 보기로 한다.
일단 필자가 인류학에 고유한 연구대상이나 방법론에 대해 깊이있는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기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바라보는 필자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인류학에서는 어떤 기술의 도입이 특정한 공동체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주목하는 형태의 연구들을 주로 해 왔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기술의 대사회적 영향 내지는 충격(impact)에 집중하는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바로 그 기술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꿔말해 기술의 등장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과정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는 두번째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인류학적 접근에서 설사 특정한 기술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이는 대체로 인공물(artifact)의 연쇄 중 일부로 파악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인공물들의 연속적인 개량을 기술의 변화요인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술변화에 관여하는 인간적 요소들이 대체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으며, 기술은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요소로 파악된다. 즉, "땅파는 막대가 쟁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야 하고, 부싯돌이 안전성냥보다 앞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구체적인 기술변화의 이론들을 대체해 버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필자의 문제의식을 종합하면 "기술적 요소를 독립변수로 두고 사회적·사상적 요소들을 종속변수로 두는" 전형적인 기술결정론적 태도가 나타남을 볼 수 있다.(주1)
이상에서 요약한 필자의 생각은 최근 인류학자들이 저술한 일련의 논문들이나 저서 속에서 상당히 유사한 문제의식을 발견함으로써 더욱 고무되었다. 예컨대 기술에 대한 기존의 인류학적 논의들을 비판하는 브라이언 파펜버거(Brian Pfaffenberger)와 같은 인류학자의 말을 빌어 보자.
물론 사회인류학자들과 문화인류학자들은 관개(irrigation)나 어로(fishing), 광업(mining), 산업(industry)과 같은 생존(subsistence)·채취(extractive) 전략과 전통사회에 대한 기술의 영향 등의 연구에 가치있는 기여들을 해 왔다. 비록 이러한 기여들을 축소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들 연구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연구들에서는 기술 그 자체가 관심이 가는 주제로 다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인류학자들은 종종 기술을 물질문화와 동일시하고 이를 주어진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기술은 인간생활에 근본적으로 외재적인(extraneous) 어떤 것이자, 공동체와 신념체계가 그것에 맞추어 적응해야만 하는 힘으로 그려진다.(주2)
피에르 레모니에(Pierre Lemonnier)와 같은 인류학자 역시 유사한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인 행위의 사회적 차원 - 즉, 주어진 사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특정한 기술을 이용하게 되며, 다른 기술을 이용하지 않게 되는지 - 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인류학자들은 기술적인 "선택"의 사회적 맥락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견지에서 기술이 사회적 생산물이 되는지와 같은 물음들을 거의 제기하지 않았다.(주3)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특정한 기술이 등장하는 '사회적' 과정에 관심을 집중하고 기술과 사회간의 대등한 '상호'작용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회학적 접근이 인류학적 접근에 대해 중요한 보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기술을 대체로 정적인 '제약요인(constraint)'으로 파악하면서 이의 사회적 영향(혹은 '결정')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인류학적 접근이 간과하기 쉬운 점들을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이 메꾸어 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은 결코 단일한 지적 흐름이 아니다. 이 안에는 배경 분야와 구체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조류들이 뒤섞여 있다.(주4)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1절에서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이 제기된 배경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후, 2절에서 이를 크게 3가지 조류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이어 3절에서는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에 대해 가해진 여러 가지 비판들을 소개하고, 4절에서는 필자의 의견을 간단히 덧붙일 것이다.
1.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 배경
'새로운 기술사회학' - 이것이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의 주창자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 의 문제설정 배경은 도널드 맥켄지(Donald MacKenzie)와 주디 와크만(Judy Wajcman)이 편집한 The Social Shaping of Technology의 편자서문(주5)에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과학자들의 연구가 "기술의 '영향', 혹은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충격에"만 관심을 집중해 왔으며, 따라서 "무엇이 사회적 영향을 가지는 기술을 형성해 왔는가?"와 같은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주6)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는 두 가지의 답변이 주로 제시되어 왔다고 말하는데, 그 첫번째는 '과학이 기술을 형성한다'라는 관념(기술=응용과학 테제)이고, 두번째는 '기술이 기술을 형성한다'라는 관념(인공물의 연쇄 테제)이다. 이들은 이러한 두 가지의 답변이 모두 기술에 대한 단순한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먼저 '기술이 과학의 응용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기술은 줄곧 독자적인 실체였으며 이들간에 긴밀한 상호영향이 생겨나게 된 것은 최근 - 특히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에 - 야 가능해진 일이었다고 비판한다. 이어 이들은 '기술은 이전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개량한 결과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러한 사고가 영웅적인 발명가에 대한 통념을 불식시키는 것에는 분명 도움이 되지만, 기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경제적·사회적 관계들을 간과함으로써 기술을 '자기진화하는 유기적 실체'로 신비화시키는 문제점이 있다고 비판한다.(주7)
결국 이들은 기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기존 답변들의 불완전성을 공격하여 기각한 후, '사회가 기술을 형성한다'라는 주장을 옹호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바로 이 문제의식이 정식화되고 정교화되어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주8)
2.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 개관
소위 '새로운 기술사회학'의 주창자들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책은 MIT Press에서 출판된 두 권의 논문집이다 -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New Directions in the Sociology and History of Technology(1987)과 Shaping Technology/Building Society: Studies in Sociotechnical Change(1992).(주9) 이 두 권의 책은 1984년과 1988년에 각각 있었던 두 차례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글들을 정리해서 묶은 것이다. 이 논문집의 편자들은 '새로운 기술사회학' 내에 상호 구분되고 종종 모순되면서도 몇몇 핵심적인 지점들을 공유하는 3가지의 접근법이 있음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첫번째는 트레버 핀치(Trevor Pinch)와 위비 바이커(Wiebe Bijker)에 의해 옹호된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COT)', 두번째는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에 의해 정식화된 시스템적 접근(system approach), 세번째는 미셸 깔롱(Michel Callon),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존 로(John Law)에 의해 도입된 행위자 그물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이다. 앞서의 논문집에 참가한 필자들은 각각 이 세 가지의 접근법들 중 하나 이상을 자유롭게 끌어다 쓰면서 자신들이 수행한 기술사회학적 사례연구를 지탱하는 근간으로 삼고 있다. 각각을 간단히 살펴보자.
1)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SCOT)
SCOT는 핀치와 바이커가 1984년에 Social Studies of Science에 발표한 논문(주10)에서 정식화된 연구 프로그램이다. SCOT는 과학지식사회학, 그 중에서도 특히 콜린즈의 경험적 상대주의 프로그램(Empirical Program of Relativism, EPOR)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EPOR의 연구 프로그램은 크게 다음과 같은 3단계로 구성되는데, 1) 과학적 발견이 자연세계에 의해 과소결정(underdetermined)되기 ?문에 이를 둘러싼 해석적 유연성(interpretative flexibility)이 생겨난다. 2) 해석적 유연성을 제한하고 과학적 논쟁의 종결(closure)을 허용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설명된다. 3) 이러한 종결 메커니즘을 광범한 사회적·문화적 배경과 관련시키려는 시도가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을 구체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보임으로써, EPOR은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라는 과학지식사회학의 핵심적인 주장을 입증하려 한다.(주11) SCOT는 이러한 3단계의 연구 프로그램을 거의 그대로 기술사회학적 연구에 적용시킨다. 먼저 SCOT의 첫번째 단계에서는 특정한 기술적 인공물을 둘러싸고 관련된 사회집단(relevant social group) 사이에 해석적 유연성이 발생한다. 즉 서로 다른 사회집단은 특정한 인공물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상이한 의미부여는 특정한 인공물에 내재한 문제점들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상이한 해결책의 제시로 이어진다. 이어 두번째 단계에서는 인공물의 의미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종결되면서 특정한 인공물이 안정화되는 단계이며, 세번째는 이러한 종결 및 안정화의 과정에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을 부여하는 단계이다.(주12)
SCOT의 이러한 연구 프로그램은 자전거, 베이클라이트(Bakelite) 합성수지, 형광등의 개발 등의 사례연구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주13) SCOT의 주창자들은 과학과 기술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다고 믿으며, 이들간의 경계는 지속적인 타협의 산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과학지식사회학의 방법론을 기술사회학에 끌어들이는 자신들의 방법론을 정당화한다.(주14) SCOT가 이전의 기술사회학과 근본적으로 차별적인 점이 있다면, 이것이 인공물의 '내용(content)'이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과학사회학자 멀케이(Michael Mulkay)의 말을 빌자면, 예컨대 "텔레비전의 사회적 의미가 맥락의존적이라는 것을 보이기는 쉽다. 그러나 무엇이 제대로 작동하는 텔레비전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가 맥락의존적이라는 것을 보이기는 어렵다."(주15) 이들은 이 중 후자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래에서 엿볼 수 있겠지만, 다른 논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기술과 사회를 어느 정도 서로 구분되는 실체(entity)로 보고 있으며, '사회'가 마치 기술의 배후에서 기술을 구성하는 요소인 듯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주16)
2) 시스템적 접근 (System Approach)
미국의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는 '시스템'의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대규모 기술체계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사회과학적인 시스템 이론의 영향을 받아 기술을 하나의 기술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으로 파악한다.(주17) 그가 파악하는 기술시스템은 우리가 통상 '기술적인(technical)' 것이라고 부르는 것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기술시스템은 인공물을 포함한 유형·무형의 기술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생산공장, 설비회사, 투자은행 등의 조직(organization)들, 과학적인 요소들(지식, 인력 등등), 자연자원, 발명가·기업가·시스템 운전자(operator) 등을 그 속에 모두 포함한다.(주18) 휴즈는 기술시스템이 대체로 다음과 같은 5단계의 과정을 거쳐 진화해 나간다고 보았다: 발명(invention) 단계→개발(development) 단계→혁신(innovation) 단계→[기술이전(technology transfer) 단계]→성장·경쟁·공고화(growth, conpetetion, and consolidation) 단계→모멘텀(momentum)의 획득 단계. 이러한 기술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을 고안하고 그것들간의 상호연계를 고려하여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설계하는 사람을 그는 시스템 건설자(system builder)라고 불렀는데, 에디슨 같은 발명가 겸 기업가(inventor-entrepreneur)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용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시스템 건설자는 기술적인 프로젝트의 진행을 가로막는 '역돌출부(reverse salient)'들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 것에 노력을 집중함으로써 시스템을 구성해 나간다.
휴즈가 내놓은 시스템적 접근의 장점은 그가 시스템이라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통상적인 이분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시스템 건설자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기술·경제·정치·사회와 관련된 문제들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이음새 없는 그물(seamless web)'이라고 불렀다.(주19) 즉, 성공적인 시스템 구성을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주20) 그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 기술과 사회, 기술과 그것이 도입되는 환경 등은 서로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요소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역사가답게 자신의 개념틀을 대단히 느슨하게, 실용적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는 사회학적인 개념틀을 강하게 정초하는 것보다는 개별적인 사례 - 특히 전기조명 및 전력공급 시스템(electric light and power system)의 경우 - 들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내놓은 기술시스템의 진화과정이 대체적인 윤곽을 그린 것일 뿐이며, 결코 절대적으로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학자들이 종종 노출되기 쉬운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1)에서 소개한 SCOT에 대해서 그는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그는 관련 사회집단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SCOT의 주장이 분명히 의미를 지니지만, 이러한 주장이 일종의 '사회결정론'으로 귀결될 위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내놓은 기술적 모멘텀 개념을 통해 기술결정론과 사회결정론의 함정을 모두 피하면서 기술변화에 대한 유연한 설명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주21)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약한(soft) 기술결정론으로 종종 비판받기도 한다.
3) 행위자 그물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
앞서 설명했듯이 행위자 그물망 이론의 주창자들은 미셸 깔롱, 브루노 라투르, 존 로 등 주로 프랑스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학자들이다.(주22) 이들은 기술과 사회간의 근본적인 구분을 제거하려는 휴즈 등의 시도를 보다 상위의 추상화인 '행위자(actor)' 개념을 이용하여 정식화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요소들간의 대칭성(human-nonhuman symmetry)를 받아들여, 인간이나 인간들이 구성한 조직뿐만 아니라 전자(electron)나 축전지 같은 자연현상·인공물들까지도 사회학적인 행위자(actor)의 범주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기술적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그 프로젝트를 담당한 엔지니어-사회학자(engineer-sociologist)들이 어떻게 서로 성질이 다른(heterogeneous) 것들을 단순화시키고 결합하여 이들을 엮는 행위자 그물망(actor-network)을 성공적으로 구성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행위자 그물망은 전통적인 사회학에서의 행위자들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구성요소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되며, 그 속에서 존재자들은 서로를 규정하고 규정받음과 동시에, 그물망을 구성하고 그물망에 의해 구성된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1970년대 프랑스의 전기자동차 논쟁, 19세기 파스퇴르의 예방접종법 도입을 둘러싼 논쟁,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친 영국의 군용기 개발 작업 등의 사례연구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행위자 그물망 이론은 과학/기술, 기술/사회, 기술/정치 등등의 이분법들을 모두 거부하고 이 모든 요소들을 '행위자 그물망' 속에 집어넣어 버림으로써 하나의 거대이론체계를 구축한다. 이러한 이들의 구도는 바이커가 최근 주장한 '사회-기술적 전체(sociotechnical ensemble)' 개념과 유사하다.(주23) 이들의 주장은 이제 기술이 사회에 의해 형성되거나 구성된다는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기술과 사회는 행위자 그물망 속에서 서로 구분되는 실체가 아니며, 이들은 그 속에서 서로 구성하고 구성받는다. 즉, 이들은 동시구성(co-construction)되는 것이다.
이들 3가지 이론틀들은 상이한 몇 가지 지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요한 방법론들을 공유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기술결정론적 사고를 공격하며, 과학적·기술적·경제적·정치적 요소들간의 본질적인 구분 역시 거부한다. 즉 이들은 '순수하게 기술적(purely technical)'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기술의 불균질성(heterogeneity)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 이들은 기술개발의 구체적인 사례연구에서 치밀한 세부묘사(thick description)를 선호하고 있다.(주24)
3.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 비판
소위 '새로운 기술사회학'에 대한 비판은 지금까지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학자, STS학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루어져 왔다.(주25) 비판자들은 우선,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이 암흑상자(black box) - 즉, 대체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기술의 '내용'을 가리킨다 - 를 열고 기술의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치밀한 사례연구를 통해 분석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이론적인 문제틀에는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반면 과학기술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규범적·윤리적인 문제틀은 결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기술을 '구성하는' 데 참여하는 행위자들 각각을 자유로운 주체로 과도하게 파악하여 구조(structure)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점 등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다. 이 글에서는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에 내포된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판단되는 랭든 위너(Langdon Winner)의 비판을 중점적으로 다루겠다.(주26)
위너는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갖고 있는 의의나 장점들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접근법이 크게 4가지 요소를 치명적으로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은 먼저, 선택된(혹은 구성된) 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관심을 대체로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기술의 사회적 영향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다소 아이러니컬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위너는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연구 역시 아직까지 충분하게 이루어져 있지 못하며 여전히 미비한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기술적인 논쟁에 아예 끼어들지도 못하고 이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된 "관련되지 못한 사회집단(irrelevant social group)"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새로운 기술사회학의 주창자들은 기술의 역사를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휘그적(Whiggish) 역사관에서는 탈피했지만, 엘리트주의적 역사관 - '승리자의 관점(the winner's point of view)'(주27) - 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세째로, '새로운 기술사회학'에는 행위자들의 행위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규정하는 구조(structure)와 문화(culture)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위너는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새로운 기술사회학'에 현대의 기술체계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전망과 입장이 전혀 제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들이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천적인 점에서는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내놓은 그 모든 정교한 세부묘사들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결국 위너는 '새로운 기술사회학'의 주창자들이 사회학적 성찰성(sociological reflexibility)이나 해석적 유연성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쓸데없고 무익해지는 논제들에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아카데믹한 하부분야로 정립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위너의 비판은 비록 단순화된 일반화 - 예컨대 "'새로운 기술사회학'은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는 아예 무관심하다"라는 식의 - 에 근거하고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 타당하다. 실제로 바이커와 같은 사회구성주의자들도 이러한 비판이 정당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실천적인 문제들과의 연관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사회학'의 주창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모든 비판들에 수긍하는 것은 아니며, 많은 경우에 이들은 이러한 비판들이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관련된 사회집단"이라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핀치와 바이커는 하나의 사례연구에서 모든 사회집단들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국 일정한 정도의 '선택'은 불가피하다고 반박하고 있으며, 사회성원들의 행위를 조건짓는 거시적인 '구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시스템적 접근이나 행위자 그물망 이론은 이러한 측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일축한다.(주28)
이제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의 개관과 그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아래에서 몇 가지 함의들을 도출해 보도록 하겠다.
4. 성찰
먼저 '새로운 기술사회학', 즉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을 바라보는 이러한 상반된 관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접근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접근법의 주창자들과 비판자들은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기존에 간과되어 왔던 기술의 '미시적' 구성의 측면을 구체적으로 밝혀내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그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접근법에 따라 수행된 사례연구들이 기술의 구성과정을 상세하게 보임으로써 기술의 신화화를 제거하는 데 공헌하고 있으며, 기술결정론을 공박하는 것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사회학'을 비판하는 논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기술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이는 것만으로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 해결에 그다지 도움이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새로운 기술사회학'이 스스로의 학문적인 엄밀함이나 내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갖는 사회적인 함의를 강조하려 한다면 이들은 의당 그렇게 구성된 기술이 사회성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까지 분석을 확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지점에서 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과 인류학적 접근의 '행복한' 접점이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술에 대한 기존의 인류학적 접근의 한계를 언급했던 학자들은 인류학적 접근이 갖는 특수성이 기술에 대한 연구에서 상당히 유용할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파펜버거는 인류학에 고유한 현장조사 연구방법(field method)과 전체론적 지향(holistic orientation)이 기술 연구에서 대단히 유의미하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주29) 특히 인류학에서 '시스템적인 사고'과 '구조의 규정성'을 강조하는 것이나, 기술의 도입이 특정한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민속지적 연구를 많이 수행하는 것 등은 앞서 위너 등이 주장한 '새로운 기술사회학'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보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앞서 0절에서 지적했던 인류학적 접근법의 한계는 오히려 사회학적 접근의 한계를 보완하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결국 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와 인류학적 연구는 기술에 대한 신화화를 제거하고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서로 훌륭하게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이 두 분야간의 협동은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 각 주 >
주1. 레슬리 화이트를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인류학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Leslie A. White, The Evolution of Culture (Chicago, 1959), p. 26 참조.
주2. Brian Pfaffenberger, "Fetishised Objects and Humanized Nature: Towards an Anthropology of Technology," Man, 23:2 (1988), pp. 236-252, 인용은 p. 236. 파펜버거는 레슬리 화이트,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 등의 인류학자들이 모두 기술결정론적인 논의들을 구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같은 글, p. 241 참조.
주3. Pierre Lemonnier, Elements for an Anthropology of Technology (Ann Arbor, Michigan, 1992), p. 2.
주4. 용어상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두 가지를 덧붙인다.
①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은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로 약칭)'과 구분되어야 한다. 2절에서 보겠지만, SCOT는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에 포함되는 하나의 조류로 파악될 수 있다.
② '기술의 사회적 형성론(social shaping of technology, SST로 약칭)'으로 통칭되어 온 또하나의 기술사회학적 프로그램이 있다. SST는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연구자들에 의해 주로 수행되어 왔으며,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으로 통칭되는 조류와는 서로 긴밀한 교류를 유지하면서도 일정정도의 거리를 두어 왔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SCOT와 SST가 서로 긴장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독자적인 조류로 파악되어 왔는데, 이는 다소 단순화된 견해이다. 그리고 용어 사용에서 이 둘이 서로 구분되지 않음을 유의해야 한다. SCOT 논자들 역시 종종 '기술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라는 말을 쓰기 때문이다. SCOT와 SST의 비교분석으로는 한경희,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과 형성론에 대한 비교분석」,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논문(1993)을 참조하라. 이 글에서는 SST에 포괄되는 사례연구들은 다루지 않았는데, SST의 최근 연구동향은 Robin Williams and David Edge, "The Social Shaping of Technology," Research Policy, 25 (1996), pp. 865-899을 볼 것.
주5. Donald MacKenzie and Judy Wajcman, The Social Shaping of Technology: How the Refrigerator Got Its Hum (Milton Keynes, 1985), pp. 2-25. [국역: 「무엇이 기술을 형성하는가」, 송성수 편,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녹두, 1995), pp. 111-149.]
주6. 송성수 편,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pp. 111-112.
주7. 송성수 편,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pp. 121-131.
주8. 이 말을 맥켄지와 와크만의 논의가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을 '낳았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 둘은 분명 유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출현한 조류라고 보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80년대 중반에 출현하게 된 것에는 과학사·과학철학·기술사·과학지식사회학·민속지학·산업사회학 등 새로운 지적 조류들의 등장 및 적용과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의 확산이라는 지적·사회적 배경들이 놓여 있다.
주9. Wiebe E. Bijker, Thomas P. Hughes, and Trevor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New Directions in the Sociology and History of Technology (Cambridge, Mass., 1987); Wiebe E. Bijker and John Law (eds.), Shaping Technology/Building Society: Studies in Sociotechnical Change (Cambridge, Mass., 1992).
주10. Trevor J. Pinch and W.E. Bijker,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ifacts: Or How the Sociology of Science and the Sociology of Technology Might Benefit Each Other," Social Studies of Science, 14 (1984), pp. 399-441. 이 논문은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17-50에 동일한 제목으로 축약, 재수록되었다. 앞으로의 인용은 재수록본의 그것을 기준으로 한다.
주11. Pinch and Bijker,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ifacts," p. 27. EPOR의 사례연구에 대한 좀더 자세한 상술은 김경만, 「과학지식사회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사상』10호(1994년, 겨울), pp. 132-154 중에서 pp. 141-144를 볼 것.
주12. Pinch and Bijker,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ifacts," pp. 28-40. 이 논문에서는 19세기 말,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자전거가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사례연구로 제시하면서 3단계 모델을 설명하고 있다.
주13. 앞서 언급한 핀치와 바이커의 논문 외에 다음의 논문들을 참고하라. Wiebe E. Bijker, "The Social Construction of Bakelite: Toward a Theory of Invention,"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159-187; Wiebe E. Bijker, "The Social Construction of Fluorescent Lighting, Or How an Artifact Was Invented in Its Diffusion Stage," Bijker and Law (eds.), Shaping Technology/Building Society, pp. 75-102. 바이커는 자신이 수행한 이러한 사례연구들을 보완하여 최근에 책으로 출판하였다. Wiebe E. Bijker, Of Bicycles, Bakelites and Bulbs: Toward a Theory of Sociotechnical Change (Cambridge, Mass., 1995).
주14. 핀치와 바이커의 이러한 입장은 자신들의 논문에 가해진 스튜어트 러셀(Stewart Russell)의 비판에 답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Trevor Pinch and Wiebe Bijker, "Science, Relativism and the New Sociology of Technology: Reply to Russell," Social Studies of Science, 16 (1986), pp. 347-360, 특히 pp. 349-351 참조.
주15. Pinch and Bijker,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ifacts," pp. 41-42에서 재인용.
주16. 이러한 구분은 Wiebe E. Bijker, Thomas P. Hughes, and Trevor Pinch, "Introduction to Part Ⅰ,"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9-15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바이커는 이후에 행위자 그물망 이론의 영향을 받아, 기술과 사회를 뭉뚱그려 하나의 '사회-기술적 전체(sociotechnical ensemble)'로 파학하는 연구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Wiebe E. Bijker, "Do Not Despair: There Is Life after Constructivism,"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8:1 (1993), pp. 113-138을 보라.
주17. 휴즈가 사용하는 시스템의 개념에 대해서는 Thomas P. Hughes, Networks of Power: Electrification in Western Society, 1880-1930 (Baltimore, 1983), pp. 1-15를 볼 것.
주18. Thomas P. Hughes, "The Evolution of Large Technological Systems,"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51-82 중에서 p. 51. 이하 이 단락에서의 휴즈의 주장은 이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그리고 휴즈의 시스템적 접근을 채택하여 사례연구를 진행해 나간 경우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다. Donald Mackenzie, "Missile Accuracy: A Case Study in the Social Processes of Technological Change,"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195-222; W. Bernard Carlson, "Artifacts and Frames of Meaning: Thomas A. Edison, His Managers, and the Cultural Construction of Motion Pictures," Bijker and Law (eds.), Shaping Technology/Building Society, pp. 175-198.
주19. Thomas P. Hughes, "The Seamless Web: Technology, Science, Etcetera, Etcetera," Social Studies of Science, 16 (1986), pp. 281-292.
주20. 존 로의 표현을 빌자면,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은 '불균질적인 공학(heterogeneous engineering)'으로 파악될 수 있다. John Law, "Technology and Heterogeneous Engineering: The Case of Portuguese Expansion,"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111-134를 참조할 것.
주21. Thomas P. Hughes, "Technological Momentum," Merritt Roe Smith and Leo Marx (eds.), Does Technology Drive History?: The Dilemma of Technological Determinism (Cambridge, Mass., 1994), pp. 101-113.
주22. 이들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주요 저작 중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Michel Callon, "Society in the Making: The Study of Technology as a Tool for Sociological Analysis," Bijker, Hughes, and Pinch (eds.),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s, pp. 83-103; John Law and Michel Callon, "The Life and Death of an Aircraft: A Network Analysis of Technical Change," Bijker and Law (eds.), Shaping Technology/Building Society, pp. 21-52; Bruno Latour, Science in Action: How to Follow Scientists and Engineers through Society (Milton Keynes, 1987); Bruno Latour, The Pasteurization of France, translated by A Sheridan and J. Law (Cambridge, Mass., 1988). 아래의 정리는 깔롱의 논문을 중심으로 하여 조금씩 발췌한 것이다.
주23. Bijker, "Do Not Despair: There Is Life after Constructivism"에 바이커의 이러한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주24. Wiebe E. Bijker and John Law, "General Introduction," Bijker and Law (eds.), Shaping Technology/Building Society, pp. 1-14.
주25. 주요한 비판문헌들 몇몇을 소개한다. 먼저 역사학적인 비판으로는 R.A. Buchanan, "Theory and Narrative in the History of Technology," Technology and Culture, 32:2 (1991), pp. 365-376을 보라. 이에 대한 답변과 코멘트로는 John Law, "Theory and Narrative in the History of Technology: Response," Technology and Culture, 32:2 (1991), pp. 377-384와 Philip Scranton, "Theory and Narrative in the History of Technology: Comment," Technology and Culture, 32:2 (1991), pp. 385-393을 볼 것. 그리고 SCOT에 대한 SST 그룹의 비판으로는 Stewart Russell, "The Social Construction of Artifacts: A Response to Pinch and Bijker," Social Studies of Science, 16 (1986), pp. 331-346; Stewart Russell & Robin Williams, "Opening the Black Box and Closing It Behing You: On Microsociology in the Social Analysis of Technology," Edinburgh PICT Working Paper, no. 3(1988) 등이 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계급이나 국가, 자본주의 사회와 같은 '거시적' 맥락을 더 강조하며 SCOT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특히 토머스 휴즈를 겨냥하여 제출된 비판으로는 David A. Hounshell, "Hughesian History of Technology and Chandlerian Business History: Parallels, Departures, and Critics," History and Technology, 12 (1995), pp. 205-224를 보라. 하운셸의 비판은 휴즈의 논의가 시스템 건설자라는 특정한 개인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으며, 대규모 기술시스템에 대한 사례연구에만 치우쳐 소규모 기술에 대한 연구에는 소홀하였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새로운 기술사회학 전반에 대한 인식론적인 비판으로는 Steve Woolgar, "The Turn to Technology in Social Studies of Science,"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6:1 (1991), pp. 20-50이 있다. 마지막으로 기술철학 및 STS학자들의 정치적·윤리적인 비판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Langdon Winner, "Upon Opening the Black Box and Finding It Empty: Social Constructivism and the Philosophy of Technology,"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8:3 (1993), pp. 362-378; Hans Radder, "Normative Reflexions on Constructivist Approaches to Science and Technology," Social Studies of Science, 22 (1992), pp. 141-173.
주26. 아래의 단락은 Langdon Winner, "Upon Opening the Black Box and Finding It Empty"에서 특히 pp. 368-373을 요약하였다.
주27. 이 말은 한스 래더(Hans Radder)의 표현을 빌어온 것이다. Hans Radder, "Normative Reflexions on Constructivist Approaches to Science and Technology," p. 161.
주28. Pinch and Bijker, "Science, Relativism and the New Sociology of Technology: Reply to Russell," pp. 353-354.
주29. Pfaffenberger, "Fetishised Objects and Humanized Nature," p.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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