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안 사실... 이유야 어찌했든 진실을 밝혀져야 하는 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17801.html 이준열사 할복자살의 진상은? | |
'어제 동경전보를 접한 즉 이준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18일 호외)
'이준씨는 분기를 이기지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중(同友會中)으로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황성신문 1907년 7월19일) 헤이그 특사 이준은 1907년 7월15일 네덜란드 현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처음 보도한 일본의 진서신문(鎭西新聞)은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서 피를 뿌렸다고 보도했으며 황성신문은 이준이 복부를 갈라 자살했다고 전했다. 대한매일신보ㆍ황성신문이나 진서신문 중 한 쪽은 오보를 낸 셈이다. 양쪽의 보도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이었을까?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2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헤이그 특사가 국외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 통해 이준의 사인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자세하게 분석했다. 사실 이준의 사인은 이미 50년 전에 결론이 났다. 1956년 이준의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개월 간에 결쳐 각종 문헌자료의 기록과 각계인사의 증언을 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할복자살은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구"였다. 조사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배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도 할복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준의 할복자살 소식은 이미 조선 전토로 번진 뒤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 쳐보세'라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또 민족주의 진영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장 많이 이용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는 '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렸다'고 서술했다. 이후에도 이준의 순국은 할복자살로 전해졌다. 최근에도 여당의 한 유력인사가 '이준열사가 배를 갈라…'라고 발언했을 정도다. 이 연구원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6년과 1962년 이준의 죽음을 분사(憤死)로 정리한 이상 사인에 대한 논란은 종식할 때"라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 애국정신의 상징적 교재가 됐으며 국외 한인사회 공동의 정신적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승욱 기자 kind3@yna.co.kr (서울=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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