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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당'인가? 단절, 그리고 새로운 출발

http://blog.ifis.or.kr/blog/index.php?blog_code=transpeace&article_id=1241
편집되어 있는 HWP 파일을 찾았다.(200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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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진보당에서 사회당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나온 글이다.
예전에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제대로 된 파일은 아예 없고 결국 구글에 캐쉬 되어 있는 것을 긁어왔다. 자료를 보니 청년좌파 42호에 실렸다고 하는데, 정확하지 않다. 사실 이 글도 원문이 전체 다 있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구글 캐쉬가 제대로 했을 것이라 믿는다.. 원래 전체가 한 문장으로 뒤 엉켜있는 것을 중간중간 내가 읽기 쉽게 나누었다..

자료 보관을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며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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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당'인가? 단절, 그리고 새로운 출발
신석준 당 기관지 위원장

나는 우리당의 명칭으로 사회당을 주장해왔다. 나는 그 동안 당내의 토론과정에서 이 명칭과 관련하여 잘못된 우려뿐만 아니라 기대도 제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려이든 기대이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겠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회당. 사람들이 이 명칭을 듣는다면 이 정당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당이라는 이 명칭은 사회주의라는 말처럼 낡은 것이다. 그것은 낡은 전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먼저 설명해야 할 점은, 우리 당이 이 낡은 전통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우리를 사회당이라고 칭하고자 하는가’라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먼저 사회당이라는 명칭과 관련된 낡은 두 개의 전통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그리고 왜 우리가 이 전통들로부터 단절하고자 하는가를 설명하겠다. 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당을 사회당이라고 부르자고 하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하나의 전통, 사회민주주의 지난 20세기의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은 상호경쟁적인 두 개의 전통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라쌀레의 주도하에 그리고 맑스의 영향하에서 창건된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기원하여 오늘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세력을 이루고 있는 운동을 지칭한다. 이 운동은 각국 정당의 이념적·정책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 운동이 자본주의의 폐절이 아니라 개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독일에서는 고데스베르크 강령 이전까지, 그리고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의 등장 이전까지 적어도 그 강령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정당임을 자칭했다.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처우 개선을 위하여 자본주의를 개혁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서 계급정당으로서의 자기 규정이 반드시 반자본주의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정했던 많은 사람들은 계급정당과 반자본주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기회주의적이고 계급배반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라는 역사목적론적 전제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계급배반적이라 함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반, 자본주의 폐절의 역사적 소임을 지고 있는 하나의 보편적 역사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반을 의미하는 것이지 절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수한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대한 배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계급, 주어진 시대에 각국의 상황에 따라 특수한 집단으로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의 특수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의 당은 분명히 국민적으로 분할된 노동자계급의 정당이었다. 이 특수한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계급정당이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분기점으로 하여 국민정당으로 개편되어 갔다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비록 그 이론적 실천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기획에 있어서 그들의 선조 라쌀레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라쌀레의 국가주의는 실제로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전체를 전반적으로 규정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존재하는 국가기구의 인수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했다. 즉 의회진출을 통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국가적 장치를 통하여 시장에 개입하며, 사회보장에 관한 입법을 추진하고자 한다. 국민국가는 시장을 규율하고 재분배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는 유효적절한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국민국가에 대한 맹신은 1차대전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애국주의로 변질시켰던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애국주의의 발생은 단순히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국가주의적 맹신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기보다, 이 맹신의 대상인 국민국가 자체의 문제, 즉 근대 국민국가가 추상적 국가시민의 국가를 이념으로 하면서도 실제로는 언어, 혈통, 역사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동족국가의 형태로 수립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국가주의적 기획이 동족국가에 대한 개혁 프로그램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사회민주주의 정권도 동족적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주의적 개혁가능성에 대한 맹신은 또한 2차대전 후 사회민주주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변화, “국민적으로 분할된 노동자계급의 정당계급의 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개편에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데스베르크 강령 이후로 각국 정당들은 독일의 예를 따랐고, 이 과정은 노조의 당에 대한 지배를 보장했던 영국노동당의 규약이 토니 블레어를 통해 폐기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결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사회민주주의가 라쌀레주의적 전통을 고수하는 한에서 필연적 과정인 바, 국민국가를 통한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정당이라는 형태가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개편은 근본적으로 라쌀레주의 진화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이 개편은 중도좌파 국민정당의 국가기구 장악이 그 나라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계급, 노동자계급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는 한에서, ‘구체적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중도좌파의 경제정책이 성장을 촉진할 수 있고, 이 정책으로부터 수혜의 양적 불균형과는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크고 작은 수혜자가 될 수 있는 한에서, 이 개편은 거꾸로 노동자계급의 특수한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의 국민적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특수한 시대에 특수하게 존재하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정당으로서 출발했다. 그러한 한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구체적인 계급구성의 변화 - 산업노동자 인구의 감소 - 에 직면하여 국민정당으로 전환한 것은 그 본래적 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가 그들이 기초로 하고 있는 구체적 노동자 계급을 배반한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이 반드시 반국민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은 우리의 입장 규정에 매우 중요한 인식이 될 수 있다. 국민정당으로서 사회민주주의는 2차대전 이후 그것이 유럽각국의 특수하게 국민적인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현실적인 노선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 노선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위기는 사회민주주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특징짓는 정치노선, 의회진출을 통한 국가기구의 장악, 개혁입법, 그리고 의회에서 다수파를 유지하기 위한 국민노선, 여기에 대한 총체적인 의심이 제기되는 시대가 대두한 것이다. 위기의 시대는 기묘하게도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경쟁자인 현실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었고,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중도좌파가 집권하게 된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990년대 신경제의 전개를 계기로 하여 명확해진 현상, 초국적 자본에 대하여 국민국가의 지위의 약화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국민국가를 통한 개혁의 실효성, 라쌀레주의적 기획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위기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라쌀레주의의 현실성과 관계된 한에서 그것은 이 운동의 정체성에 관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에 대한 국민국가적 통제의 한계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두 그룹으로 분열시켰다. 그 하나는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을 수정하는 대신에 사회민주주의적 기획의 결과물인 사회국가, 복지국가의 형태를 세계화하고자 하는 세력, 적어도 유럽 지역의 지배적인 국가형태로 확장하고자 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제3의 길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와 시장자유주의의 절충을 도모하는 세력이다. 두 개의 흐름은 적어도 통합 유럽에서는 그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비유럽국가에서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유럽처럼 지역경제 통합에 관한 프로젝트가 없고, 국민경제력에 있어서도 더 초국적 자본에 노출되어 있는 비유럽국가 국가들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기획의 실현가능성은 매우 비관적이다.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실현가능성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민사회론자들 또는 이들과는 달리 국가시민적 전통을 강조하지만 사회국가를 비판하는 하버마스와 같은 이들의 등장도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위기의 단면을 보여준다. 물론 비국가적·시민사회적 운동과 기구들을 통해서 시장 및 국가기구를 통제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은 물론 시민사회, 국민국가, 경제사회(시장)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상이한, 상반되기까지 하는 입장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이 서있는 철학적·지적 전통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 정치노선에 있어서도 이들 사이에는 국가적 정치의 의의에 대한 분명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국가적 정치에의 참여를 주장하며 시민사회적 힘이 관철될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목표로 하는 입장들도 있는 반면에 국가적 정치에 대한 혐오와 회의가 두드러지는 입장들도 공존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공통점도 존재한다. 그들이 자본의 사회적 권력을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틀안에서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권력을 - 그것이 국가적 정치이건 비국가적 정치이건 - 정치 일반의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수단의 비계승적 성격에 못지 않게 목적의 계승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기구가 아닌 시민사회적 담론, 공론의 장을 통하여 그들이 수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는 자본주의하에서의 개혁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세계사적 목표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을 충실히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지구적 시민사회의 구축을 통하여 초국적 자본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국민국가의 한계가 드러나고 또 한편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90년대 이후로 현실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비국가주의적 운동이 과연 초국적 자본을 통제할 사회적 권력 - 세계시민사회 - 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계없이 이 운동은 국민국가의 위기의 시대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기획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단절 우리가 우리를 사회당이라 명명할 때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낡은 의미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새로운 의미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해방된 사회로 인간의 역사가 어떤 예정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다는 역사형이상학을 거부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자본주의적 사회형식이 인간이 도달한 최고·최후의 형식이며, 가능한 것은 그 형식의 지배하에서의 개혁일 뿐이라는 입장을 또 하나의 역사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한다. 현재가 역사의 필연적 종착이라는 사고는 현재의 전복이 역사의 필연적 진행이라는 사고와 마찬가지로 역사주의적이고 역사형이상학적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입장에 선다면, 우리는 사회당이라는 명칭에 결부된 하나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어법에서 보자면 좌파적 시민사회운동으로서 우리를 인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자본주의적 현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고와 탈형이상학적 사고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전통, 맑스-레닌주의 사회당이라는 명칭이 상기시킬 수 있는 20세기의 또 하나의 전통은,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체제, 스스로를 맑스-레닌주의라 일컬었던 전통이다. 이들은 물론 사회민주주의적 전통과 자신을 구별짓기 위하여 당명으로는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애호하였다.

그러나 당명만으로 따질 경우에도 이 전통이 2차대전 이후에 주로 사회당, 노동당, 인민당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회당이라는 명칭은 맑스-레닌주의 전통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사회당이라는 명칭이 2차대전기의 좌파 통일전선 또는 인민전선의 어법에 입각한 당명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정확하게는 공산당의 주도하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당 또는 반파시즘 세력의 연합정당을 의미한다. 맑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사회당이라는 명칭은 분명 하나의 정략적 선택이라 이해될 수 있다. 반면에,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이 전통의 어법체계에서 공산주의라는 단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그것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과도기 사회,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 사회를 의미한다. 맑스-레닌주의의 어법으로 보자면,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국가형태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회화 형태 또는 사회구성의 형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실제 대상은 자본주의 사회와 구별되는 대안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와 구별되는 특정한 국가형태였을 뿐이다. 사회주의라는 명칭은 1차대전 이후에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일국적 권력, 일국사회주의를 의미했고, 2차대전 이후에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세계체제를 의미했다. 이 전통은 분명히 라쌀레보다 맑스를 선호하였고, 스스로를 맑스주의 운동으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국가기구의 인수보다 그것의 타도, 프롤레타리아트 권력 또는 인민권력으로의 전화가 강조되었다. {고타강령비판}이나 {국가와 혁명}은, 이 전통이 자본주의 국가에 대하여 취했던 근본방책을 확언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맑스-레닌주의라 불리는 전통과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의 본질적 공통점이다. 그것은 첫째로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같은 정도로 국가주의적 맹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이 전통이 주장했던 실질적 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형식들에 대한 논구는 지극히 무비판적이었고 피상적이었다는 점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권력의 주체에 대한 확인을 넘어서서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화 형식에 대한 실험을 요구한다. 그것은 분명히 사회주의를 국가형태가 아니라 사회화형태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을 지렛대로 하여 자본주의와 시장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 이상이 결코 아니었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러므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맑스-레닌주의가 기획했던 자본주의 국가의 극복은 새로운 사회화 형식에 대한 실험이 전혀 아니었고, 본질적으로 국가자본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이 국가자본주의가 왜 붕괴하였는가를 상론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을 벗어난다. 오히려 이 글에서 천명하고자 하는 바는 맑스와 레닌,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자들의 이론에서 과도기 사회에 대한 표상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모순적이라는 점,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대안사회에 대한 표상은 지극히 무비판적이라는 점이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하여 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의 사회관에 큰 영향을 미쳤던 『자본』의 한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하여,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써 일하며 또 자기들의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의식적으로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합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①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재현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다만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사용대상이었다. 자유인들의 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분은 다시 생산수단으로 사용되어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분은 결합체 구성원들의 생활수단으로서 소비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그들 사이에서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②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 여하에 따라서,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 여하에 따라서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해 보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각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수행되어야 할 여러 가지 종류의 작업과 결합체의 다양한 욕망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동시에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서, 따라서 공동생산물 중에서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몫의 척도로 된다.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이나 노동생산물에 대해서 갖는 사회적 관계는 여기서는 생산에 있어서도 분배에 있어서도 명료하고 단순하다.”
심오한 맑스는 여기에서 그의 저작의 대중화를 돕기 위하여 하나의 비속화를 행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자유인들의 결합체”를 단순히 소유론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즉, 사적 소유의 공동소유로의 이행을 통하여 “자유인들의 결합체”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둘째로 이와 같은 소유권의 변화를 통하여, 사적 노동과 사회적 노동의 모순뿐만 아니라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모순도 종식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쓰고 있다(문장 ①). 물론 맑스는 이하의 구절에서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이중성이 종식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는 “각자의 노동시간”(이것은 추상적 노동의 시간일 것이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분배는 상품생산사회에서의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총노동의 “사회적 배분”과 사적 노동의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몫을 측정하는 기능을 가진다. 시장에서 어떤 물건을 교환할 당시 그 물건의 생산에 현재 투입되고 있는 추상적 노동의 시간이 이 두 가지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스가 말하는 “자유인의 결합체”에서도 동일한 척도가 적용된다. 아마도 자본주의와 “자유인들의 결합체”는 잉여가치의 전유가 공동적으로 이루어지느냐 혹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느냐만 다를 것이다. “생산물의 일부분이 다시 생산수단으로 사용되어 사회에 남는” 한에서 축적기금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것의 생산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 축적기금을 제외한 소비기금의 분배에서 맑스는 ‘업적에 따른 분배’를 하나의 중요한 차이로 보고 있으나 어떻게 교환기구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업적의 산정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즉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노동으로 환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시장이 존속할 수 있다는 가정이고 둘째는 배급제가 시장을 대체한다는 가정이다. 교환기구가 없는 배급기구가 업적의 산정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맑스의 가치형태론에 입각해 볼 때 매우 의문스럽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맑스가 위의 두 가지 중에서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하다(문장②). 또 하나의 단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자유인의 결합체”에서는 “생산에 있어서도 분배에 있어서도” 사회적 관계가 “명료하고 단순하다”고 주장한다. 이 명료하고 단순함은, 때로는 배급제로 이해되기도 했고, 이 보다는 좀더 맑스를 심오하게 이해한 사람들에 의해서는 시장사회주의가 주창되기도 했다. 물론 시장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이 다른 것인지는 이들에게도 “명료하고 단순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 구절의 불명료함과 비속함은 실제로 있었던 사회주의의 전역사, 시장과 배급제의 혈투의 역사 전체를 규정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당이 사회당이라 명명되는 한에서, 우리가 이 단순하고 비속한 “사회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대안사회란 그것은 “자유인의 결합체”를 향한 정치에 의하여 실현될 것이라는 말 이외에 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비속한 대안사회의 실패를 알고 있는 한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왜 사회당인가? 위에서는 사회주의, 사회당과 연관된 낡은 두 가지 전통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개략적으로 밝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를 사회당이라 명명하고자 하는가? 이하에서는 이점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낡은 전통의 국가주의적 기획이 우리 시대에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종 수준의 사회적 권리의 법적·제도적 보장이 정치의 목표로부터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우리는 낡은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상속인들인 비국가주의적 시민사회 단체들의 현사회에 대한 역사형이상학을 비판한다. 세상에는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투쟁을 통하여 세계시민사회를 구성하려는 기획에 하나의 좌파적·탈형이상학적 분파로서 참여하고자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의 역사목적론과 단순우직한 비속화한 대안사회관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대안사회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있기 때문에 그 대안도 있는 것이고, 대안은 바로 부정적 정치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든 낡은 전통, 그리고 모든 낡은 전통의 새로운 전개형태로부터 우리를 단절하면서도 우리를 떳떳이 사회당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회당을 주장한다.